중간고사가 끝난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의 한 고교 앞에서 만난 윤모(18)양은 대통령 선거일인 5월9일 하루종일 학원에서 부족한 수학을 보충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윤양과 같은 고교 3학년 수험생의 일상은 투표일이라고 바뀌지 않는다. 학교 대신 학원으로 행선지가 바뀔 뿐이다.
윤양은 “대선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닌데, 선거권도 없고 대학수학능력시험도 코앞이니 부모님이 TV 토론 등을 보지 못하게 한다”고 푸념했다. 지난달 25일 열린 토론회 때 잠시 보려고 거실에 나왔다가 “중간고사가 내일인데, 무슨 토론회냐”며 면박을 들었다고 한다.
대선에 관심을 가지면서 선거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윤양의 말에 부모는 펄쩍 뛰었다. 윤양의 어머니 김모(48)씨는 “한창 입시로 바쁜 시기일 뿐더러 자기 앞가림도 하기 벅찬 나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난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뒤 아이가 정치에 부쩍 관심이 높아졌다”며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다”고 넋두리를 했다.
윤양과 어머니는 정치 관심을 둘러싸고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한다. 지난 2월에는 윤양이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정치 관련 뉴스와 콘텐츠에 '좋아요'를 눌렀다가 어머니와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김씨는 “내신과 모의고사 등 챙길 게 한두가지가 아닌데 페이스북이랑 뉴스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속이 타들어갔다”고 토로했다.
우리나라에서 18세가 되면 형법상 형사 미성년자에서 벗어나 범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한다. 아울러 헌법상 납세 의무와 병역법상 병역 의무, 근로기준법상 노동의 의무를 지는 나이이기도 하다. 이 같은 국민의 의무를 강요받으면서도 투표할 권리는 없다는 데 불만을 토하는 청소년도 있다.
대학에 들어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하는 게 꿈인 최주환(18)군도 투표권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최군은 “앞으로 펼쳐질 새 정부에서 대학에 입학하고, 군대도 가고 할 텐데 내가 살아갈 세상을 결정할 권한이 없다는 게 슬프다”고 털어놨다.
평소 정부 정책과 사회 문제 등에 관심이 많다는 최군은 투표권 연령에 하향 조정이 필요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최군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유일하게 대한민국만 19세 이상에 투표권을 주고 있다”며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하지만 정치는 여전히 후진국”이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2013년 국가인권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2011년 기준 전 세계 국가의 92.7%가 선거 하한 연령을 만 18세로 두고 있다. 232개 국가 중 215곳이 18세 투표권을 보장하고 있는 셈이다. 이 중 오스트리아 등 6개국은 16세 이상이면 선거권을 준다. 한동안 OECD 가입국 중 우리와 함께 19세 하한을 고집하던 일본조차 지난해 법을 바꿔 세계적인 추세에 동참했다.
고2 김유진(17)양은 “초등학교 시절을 독일에서 보냈는데, 지금까지 당시 친구들과 연락한다"며 "독일은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청소년들의 정치 참여를 돕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정당 가입과 선거 운동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며 “정치 참여로 어린 나이부터 책임감을 갖고 행동하는 등의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난다고 들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중장년·노년층 일각에선 청소년들의 이른 정치참여를 곱게만 보지 않는다. 경기도의 한 사립고교에서 교감을 지냈던 박모(68)씨는 “청소년의 정치 참여가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총선과 대선 등 선거를 앞두고 학교 분위기가 뒤숭숭해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창 공부해야 할 고3에게 투표권이 주어지면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를 담은 발언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가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선거연령 18세 하향에 찬성한다는 답변은 50.4%, 반대는 41.8%로 각각 나타났다. 찬성 의견이 우세하긴 하나 팽팽하게 갈린 형국이다. 특히 조사 결과 연령대별 찬반 차이가 두드러졌는데 19세부터 40대까지는 과반이 찬성했으나, 60대 이상은 27.7% 동의에 그친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 1월 국회 정론관에서 국회의원들과 민주주의 공동체를 표방하는 '틴즈디모'(TeensDemo) 소속 청소년들이 18세 선거권 인하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선거권 연령의 하향조정 문제는 이번 대선을 앞두고 핫이슈로 떠오르기도 했다. 정치권에서 팽팽한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지난 2월 임시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등을 중심으로 선거연령 인하 관련 법안의 통과를 추진했으나 정부와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현재 주요 5당 중 민주당과 국민의당, 바른정당, 정의당은 선거권 18세 하향을 당론으로 정하고 있다. 반면 자유한국당은 “부작용도 고려해야 한다”며 결정을 유보한 상태다.
일각에서는 각 정당이 지지 연령층에 따라 선거연령 하향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상대적으로 젊은층 유권자의 지지율이 높은 민주당은 선거연령 하향을 적극 주장하고 있으나, 60대 이상을 주요 동력으로 삼는 한국당은 소극적으로 임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긍정적 현상이면서도 자칫하면 감정적으로 다가갈 수 있어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정치 참여 확대가 정치·사회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젊은 세대들의 참여가 활발해지면 그만큼 미래 세대를 위한 정책이 다양하게 반영될 수 있다는 기대에서다.
연세대 김기정 교수(정치외교학)는 “우리나라 인구 분포를 살펴보면 50대 이상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며 “중·장년층이 결정한 미래가 20대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선거권을 낮춤으로써 젊은이들의 생각과 정치적 요구가 적극 반영될 수 있다”며 “'취업 절벽' 등으로 젊은이들이 희망을 찾지 못하는 시대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긍정적인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신중론도 제기된다.
신율 명지대 교수(정치외교학)는 “학생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이 시민들의 정치참여 확대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라면서도 “청소년들이 기초지식을 얼마만큼 갖고 투표권을 행사하느냐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문제”라고 우려했다. 이어 “제대로 된 정보 없이 어린 학생들이 정치에 참여하면 감정적으로 접근할 가능성이 있다”며 “이는 정치의 왜곡으로 직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신 교수는 또 “정치는 사람 중심이 아닌 시스템적으로 이해하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며 선거권 하향 조정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지현 기자 becreative07@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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