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중앙선거관리위원회 기자단 |
투표는 국민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지만, 이조차 향유할 수 없는 처지의 이들도 적잖다.
생업이 우선인 탓이다.
여행사 영업사원 A(35)씨는 날마다 지점에 들러 고객들에게 여행상품을 팔아야 하는데, 대통령선거 투표날인 9일도 마찬가지 신세다.
고객을 상대로 한 신뢰가 생명인 직업인지라 매일 같이 출근해 그 자리를 지켜야 하고, 고객들이 언제 문의를 해올지 몰라 늘 비상대기를 해야 한다.
A씨는 "업무 특성상 매일 같이 현장으로 나가 고객들과 소통하고, 여행상품 관련 정보를 업데이트해야 한다"며 "(투표를 하자고) 회사 일을 접을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하소연했다. 이어 "특히 나처럼 날마다 일해야 하는 영업사원 입장에선 말 못할 어려움이 많다"고 덧붙였다.
◆"투표요?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365일 문을 여는 마트나 편의점 등 유통업계에서 종사하는 직원들도 투표할 짬을 낼 수 없기는 매한가지이다.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심지어 새벽에도 일하는 탓에 상당수 직원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서울의 한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B(30)씨는 "내가 투표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잠깐의 휴식시간뿐"이라며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데, 그 시간을 내 집 근처 지정된 장소로 가 투표하는 것은 사실상 힘들다"고 토로했다.
건설직이나 비정규직 근로자, 휴일에도 근무해야 하는 서비스직 종사자들도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들이 꽤 된다.
투표일은 임시 공휴일인 만큼 사기업은 근무 여부를 자율 결정할 수 있는데,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정상 근무하는 곳이 적지 않은 탓이다.
◆별 보며 출·퇴근하는 버스기사들에게 투표는 그저 '사치'
사업에 실패한 뒤 올해 초부터 건설 일용직으로 일을 하고 있다는 C(51)씨는 “지난 황금연휴에도 빠짐없이 출근했다”며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에 주말이고 공휴일이고 가릴 것 없이 일한다"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울의 한 식당에서 조리보조로 근무하고 있는 D(28)씨도 “기본 근무시간은 9시간이지만, 미리 새벽에 출근해 각종 식재료를 다듬어야 하고, 밤엔 남아 뒤처리를 해야 한다”며 “바빠서 식사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 처지라 투표는 꿈도 꾸지 못한다”고 전했다.
버스 기사들도 투표가 여의치 않다. 아침 일찍 출근해 밤 늦게 퇴근하기 일쑤인 탓이다.
5년째 마을버스 기사로 일하고 있는 E(67)씨는 “새벽 5시쯤 출근해 자정이 넘은 심야시간에 퇴근하는 날도 있다”며 “평소 정치에 관심이 많은데, 라디오를 통해 개표방송을 청취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고 푸념했다.
일이 바빠 점심조차 챙겨 먹기 쉽지 않은 마을버스 기사의 고단한 일상으로 미뤄보면 투표는 오히려 사치로까지 느껴졌다.
새벽부터 일을 시작해 밤늦은 시간까지 비상대기를 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오토바이 퀵서비스 배달원이다. 이들은 배달시간을 1분, 1초라도 단축하려고 대기하는 게 일상인 만큼 투표는 언감생심이라고 한다.
서울의 한 전통시장 앞에서 만난 F(48)씨는 퀵서비스 일을 한 지 6개월 정도가 됐다고 소개했다. 그는 “아무런 배달요청 콜이 없어 일을 하지 못하는 게 가장 힘들다”며 “바쁘고 힘들어도 일감이 많은 날이 차라리 낫다”고 말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은 뒤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
◆투표권 미보장 고용주에게 1000만원 이하 과태료 부과 규정 신설
이렇게 참정권의 사각지대가 불거진 형편이다 보니 이를 보장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최근 대한상공회의소 등 주요 경제단체에 19대 대선의 근로자 투표시간을 보장해달라고 요청했다.
선관위는 대한상의와 중소기업중앙회 등 경제단체는 물론이고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에도 소속 조합원의 근로자를 상대로도 고용주에게 투표에 필요한 시간을 청구할 수 있다는 점을 안내했다.
특히 건설현장 비정규직 근로자나 중소기업 직원들이 투표권 행사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투표에 필요한 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지도·감독할 것을 고용노동부 등에 요청하기도 했다.
공직선거법에는 공무원과 학생 또는 다른 이에게 고용된 이들이 투표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보장돼야 하고, 이를 '휴무 또는 휴업으로 보지 아니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이번 대선에서 사전투표 기간(5월4~5일)과 선거당일(5월 9일) 모두 근무하는 근무자는 투표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고용주에게 청구할 수 있고, 기업체 등의 고용주는 고용된 사람이 투표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청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선거일 전 7일(5월2일)부터 선거일 전 3일(5월6일)까지 5일간 인터넷 홈페이지나 사보, 사내 게시판 등을 통해 알려야 한다.
이처럼 투표시간을 보장하지 않는 고용주에게는 1000만원 이하 과태료를 부과하는 규정이 신설되기도 했다. 이에 몇몇 기업은 근로자들이 여유 있게 투표할 수 있도록 자율적으로 휴무를 결정하거나 출근시간을 미루고, 퇴근을 앞당기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근로자 대상 투표 시간 청구 권리를 알리는 기업은 드문 것으로 알려져 단속 등 효용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대책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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