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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미의영화산책] 디오니소스적 여유의 한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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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9-01 21:10:05 수정 : 2017-09-01 21: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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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잔잔한 흥행몰이를 하는 영화 ‘파리로 가는 길’(감독 엘레노어 코폴라)은 보는 동안 흐뭇한 미소를 머물게 한다. 하지만 마냥 가볍게만 볼 영화는 아니다. 목표지향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며 은근슬쩍 우리를 뜨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일중독인 영화 제작자 마이클(알렉 볼드윈)과 내조의 여왕인 아내 앤(다이앤 레인)은 프랑스 칸에서 부다페스트로 가는 경비행기를 타기 위해 이동 중이다. 동승한 남편의 친구 자크(아르노 비야르)는 가는 길에 자꾸 차를 세워 갓 딴 딸기바구니를 전해주기도 하고, 귀가 아프다는 앤을 위해 귀에 넣는 약을 사오는 등 자상하기 이를 데 없다. 부부는 경비행장에 늦을세라 그의 친절도 달갑지 않다. 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신선한 딸기는 맛있다는 표정이다.

경비행기의 심한 소음을 견디기엔 귀의 통증이 만만치 않은 앤이 남편과의 동승을 포기하고 혼자 기차를 타고 파리에 먼저 이동하기로 결정하려는데, 감초 자크는 기차는 만석이니 파리까지 차로 모셔가겠노라고 자청한다. 앤은 얼결에 자크의 차로 파리로 향하는데, 그는 아름다운 남프랑스 코트다쥐르 명소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맛집에 들러 프랑스산 특선요리에다 와인까지 눈앞에 내놓는다. 파리에는 언제 갈 거냐며 독촉하는 앤에게 “파리는 어디 안 가요”라고 말하며 여유를 부린다. 게다가 오픈카 뒷좌석을 장미로 채워 잠자고 있던 앤의 후각과 시각을 깨우는가 하면, 강가 풀밭에 흰 천을 깔아 먹을거리를 차려 놓고 앤을 세잔의 ‘풀밭 위의 식사’ 주인공까지 되게 한다.

영화는 앤과 자크의 대비를 통해 아폴론적 가치관에 갇혀 있던 우리를 자유분방한 디오니소스적 가치관으로 이끈다. 80살에 데뷔하는 여성감독이 전하는 메시지가 인생이란 이 악물고 사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가슴속 깊이 잠자던 자유와 해방의 본능을 깨워 훨훨 날아보라고 우리에게 권유하는 것은 아닐까.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로 지칭되는 조르바가 떠오른다. 디오니소스적인 감성과 자유가 아폴론적 질서를 비웃으며 승리를 천명하는 조르바처럼 큰 목소리는 아니지만, 자크는 우리 귀에 대고 소곤댄다. “인생을 길게 사는 법, 그게 바로 여유”라고.

황영미 숙명여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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