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가 던진 첫마디였다. 40대 중반까지 뉴욕에서 정치학도로서 꿈을 키우던 그였기 때문이다.
작가들 사이에서 독설가로 유명한 김웅기 이사장. 그는 “작가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일이 바로 작품의 좋고 나쁨에 대한 디테일한 입장을 표명해 주는 것”이라며 “면전에서 ‘아름다운 모독’을 하고 뒷전에서는 덕담을 하는 풍토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
그는 당시 소호 화랑가나 미술계에 뭔가 비서구 출신인에게 보이지 않는 진입장벽이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조사를 했다. 그 과정에서 미술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한국 출신 작가들이 왜 뉴욕 주류 미술계에 진입이 안 되는지에 대해서 한국 작가들에게 컨설팅도 하고 답을 내려고 시도도 했다. 아예 2008년쯤엔 대학 교수 자리로의 길을 포기하고 미술에 뛰어들기로 결심하면서 옵시스 인터내셔널이란 미술 컨설팅 회사를 미국에 설립했다. 2011년엔 한국에 들어와 갤러리 ‘옵시스 아트’를 시작했다.
“작가를 가장 잘 돕는 길이 그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은 가격으로 팔아서 그 수익으로 작가가 계속 생활하며 작업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실용적 가치가 없는 비싼 작품을 그 가격으로 팔기 위해서는 그 작품의 미학적 가치에 대해서 확신을 가져야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갤러리는 철저하게 제가 확신할 수 있는 작가들만으로 전시를 운영하는 전속제로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공급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새로 시작하는 젊은 작가들 중심으로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지요. 그리고 그 작가들이 전시 후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고 일정 정도 계통을 세워 작업한 결과물을 전시하는 첫 번째 갤러리가 되어야 하니까, 누가 보더라도 저희 갤러리에서 작가의 전시 기록을 챙기면 그 작업 진행 과정과 발전 과정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작가의 미학적 성취와 정보가 체크 되는 거죠.”
결과적으로는 그의 이런 운영방식은 획기적이었지만 국내 미술계 현실에서 보면 너무 이상적인 것이였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컨센서스가 매우 빈약하고, 미학적 가치와 시장적 가치의 간극이 극단적으로 벌어져 있어서 새로운 시장을 만들지 않으면 갤러리 생존의 길이 보이지 않는 듯했습니다. 국내에 아무런 미술적 연고가 없었고, 작가들도 대부분 뉴욕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젊은 작가라 별다른 기반이 국내에 없어서 수요가 생겨날 수가 없었던 구조였죠. 게다가 자기들 작품에만 관심이 있는 전속작가들이 대부분이라 국가지원사업이나 이런 데도 관심이 없었고, 무지해서 오로지 판매에만 서로 목을 걸고 있었는데 뭐 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죠.(웃음)”
김 이사장이 주관하고 있는 ‘성너머집’터 주변에 조성된 전시공간 ‘도원’. 예전에 복숭아밭이 많아 이름을 도원으로 붙였다고 한다. 건축사사무소 도시건축집단 성북동 |
“갤러리 적자가 누적되어 출구를 찾던 중 지인이 건물을 하나 매입해서 다시 시작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와 옳다구나 하고 갤러리를 접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성북동에 성북문화재단이 예술창작터를 통해 이 지역 미술에 적극 지원하고 있는 환경에 주목하게 됐습니다. 더불어 오뉴월이나 갤러리 버튼 같은 작지만 매우 정열적으로 활동하는 갤러리들이 있어서, 이들과 협력하여 지역 아트신을 창출하면서 갤러리를 운영하면 되겠다 싶어서 성북동에 정착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차에 성북문화재단 김종휘 대표가 북악산 기슭에 무허가 건물과 유휴 공간이 있는데, 이 시설을 이용하여 새로운 성북동 미술생태계를 조성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공공시설을 사용하기 위해서 공적 법인을 설립해야 한다고 해서 협동조합 아트플러그를 지난 2월에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협동조합 아트플러그는 성북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조합이다. 처음에 35명의 조합원으로 총회를 했는데 그중 절반이 시각예술 종사자다. 국악, 작곡, 영화, 무대디자인, 문화예술기관 종사자 등도 대거 참여하고 있다. 성북문화재단 협치 파트너로 성북예술창작터와 더불어 성북예술동 행사를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다. 성북문화재단과 공동으로 제1회 제주비엔날레와 제1회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에 참여 중이다.
“한국에 들어와서 미술계에서 일하면서 가장 놀란 일은 미술 전문가와 미술 애호가 사이의 골이 엄청나게 깊다는 것이었습니다. 비엔날레나 미술관에 전시되는 작품들과 아트페어나 일반 화랑에 전시되는 작품이 너무 다른 종류라 깜짝 놀랐습니다. 담론의 레벨에서는 뉴욕이나 베를린과 별 차이는 없는데, 실제 마켓이나 미술관객이나 컬렉터의 작품에 대한 이해나 선호도가 너무 달랐습니다. 매우 장식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작품들이 대부분 거래되고 있었고, 서구의 블루칩 작가들에 대한 쏠림이 지나쳤습니다. 서구 미술 시장이나 동향에 대한 정보가 피상적이고 한국 중심적이어서 실제 뉴욕이나 런던, 베를린 같은 미술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도시의 현장에 대해서는 가공할 만한 지적 빈곤과 무지 속에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평론가들이나 아트 딜러들도 매우 제한적이고 편향된 정보와 믿음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아트와 협동조합의 좋은 궁합을 모색하고 있다.
“아티스트들은 조직이나 단체에 대해서 본능적인 혐오가 있습니다. 조합도 단체니까 좋은 궁합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한국 미술 자체가 공공 기금이나 지원을 통해 연명되고 있는 실정이라 어떻게든 단체나 조합의 그늘 아래서 기금이나 지원을 공동으로 신청하고 기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조금 더 용이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400여년의 서양 미술의 역사를 통틀어 고립된 미술가가 떠오른 경우는 없습니다. 뛰어난 미술가는 집단 속에서의 은근한 경쟁과 교류 속에서 생겨났습니다.” 그의 뚝심 있는 도전에서 한국 미술의 새로운 미래가 기대된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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