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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역사 새로 쓴 그날… 인천 월미도 역사는 멈췄다

입력 : 2017-09-16 03:00:00 수정 : 2017-09-15 21: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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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구 지음/서해문집/1만3900원
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강변구 지음/서해문집/1만3900원


1950년 9월10일, 미군 해병대 전폭기 4대가 인천 월미도 상공에 나타났다. 이들은 오전 7시부터 낮 12시까지 민간인 600여명이 살고 있는 거주지역에 네이팜탄 95발을 투하했다. 이날 폭격으로 월미도에 살던 민간인 100여명이 숨졌다.

신간 ‘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는 관광지로만 알려진 인천 월미도의 아픈 역사를 되짚는 책이다.

1950년 9월15일 유엔군은 맥아더 장군의 지휘하에 인천으로 상륙했다. 이날의 ‘인천상륙작전’은 6·25 전쟁의 전세를 바꾼 작전으로 평가받는다. 매년 9월15일이면 이날의 승리를 기념하는 성대한 행사도 열린다.

그러나 월미도 주민들에게 이날은 가족과 친구를 잃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상처의 기억뿐이다. 당시 미군은 남한의 민간인에게 왜 폭탄을 투하했을까.

책은 미군이 민간인 마을의 존재를 알고도 폭탄을 투하했다고 주장한다. 당시 미군은 인천상륙작전을 낙관하지 못했다. 월미도는 남과 북 모두에게 전략적 요충지였고, 미군은 월미도에 주둔 중인 인민군의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결국 인천상륙작전이 가시화되면서 월미도 폭격은 작전의 첫 목표가 됐다.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월미도를 완전히 무력화하기로 계획한 것이다.

이날의 계획은 약 120가구, 600여명이 살던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가족과 이웃, 집과 고향을 모두 잃은 원주민들에게 월미도의 역사는 이날로 멈춘 것이나 다름없다. 공교롭게도 월미도의 역사가 끝난 날, 6·25 전쟁의 역사는 새로 쓰였다.

원주민들의 수난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됐다. 폭격으로 마을을 떠나야 했던 원주민들은 귀향을 시도했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 월미도의 관리권이 미군에서 남한 정부로, 다시 인천시로 넘어가는 동안 원주민들의 의견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2008년 2월 진실화해위원회는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에 대한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고, 월미도 원주민들의 귀향과 명예회복 조치 강구 등을 정부에 권고했다. 그러나 10여년이 다시 지난 지금도 별다른 조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우연히 월미도와 관련된 신문기사를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된 저자는 “전쟁에서의 승리와 죽음을 모두 기억하는 것이 전쟁 없는 세상을 여는 첫걸음”이라며 “전쟁의 승리라는 국가의 목표를 우선한 그 어떤 ‘희생’도, 보호받아야 할 개개인의 생명권이 부당하게 침해받은 그 어떤 ‘학살’도 모두 함께 오롯이 기억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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