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오후 직장인 김모(32)씨는 사내회식도 포기하고 집에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누리꾼 사이에서 유망하다고 알려진 한 가상화폐의 ICO(가상화폐 공개·Initial coin offering)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ICO는 가상화폐를 발행하는 기업이 투자자를 모집해 자금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기업은 정해진 기간 투자자에게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기존 가상화폐를 받고 그 보상으로 자신들이 만들 가상화폐를 지급한다.
김씨는 “신규 가상화폐를 받기 위한 ICO 경쟁은 매우 치열하다”면서 “아직 출시하지 않은 가상화폐이기 때문에 저렴하게 살 수 있고 거래소에 상장하면 가격이 몇 배나 상승하기도 한다”고 부푼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오후 8시가 되자 ICO가 이뤄지는 사이트에 구매 버튼이 생겼다. 하나 많은 참가자가 몰린 탓에 사이트는 순간 정지됐다. 사이트는 곧 복구됐지만 ICO는 이미 끝난 뒤였다. 17억원 규모의 해당 가상화폐 ICO는 17초 만에 마감됐다. 김씨도 시간 맞춰 마우스를 연신 클릭해봤지만 그의 ICO 도전은 허무하게 실패했다.
최근 가상화폐 시장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정부의 규제 논의로 하락장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 6일 국내 거래소 비트코인 1개 가격은 2888만원까지 치솟았지만 현재는 급락해 24일 오후 2시 기준 1250만원수준을 맴돌고 있다.
그런데도 ICO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고 있다. 발행하기 전 가상화폐를 저렴하게 구입해 이후 ‘대박’을 기원하는 기대심리 때문이다. 신규 가상화폐가 대형 가상화폐 거래소에 상장한다면 가격이 몇 배씩 치솟곤 한다.
가상화폐 투자자들은 텔레그램,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ICO 일정, 새로 발행되는 가상화폐 정보 등을 공유하고 있다. 김씨가 도전한 가상화폐의 경우 ICO 정보를 공유하는 카카오톡 채팅방만 1000명 규모로 3개가 만들어졌다는 후문이다.
주식시장에서 이뤄지는 IPO(기업공개)와 달리 가상화폐 시장의 ICO는 법적인 절차에 따라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위험성이 매우 크다. 현재 상당수 ICO 투자자들은 가상화폐를 어떤 식으로 만들고 운용하겠다는 계획이 담긴 일명 ‘백서(white paper)’와 사이트 내 홍보영상, 개발자 신상정보 등에 의존해 투자를 결정하고 있다. ICO는 대부분 가상화폐가 만들어지기 전 투자가 이뤄지기 때문에 제대로 된 검증이 힘들다.
텔레그램 CEO(최고경영자) 파벨 두로프는 텔레그램을 사칭하는 스캠(사기) 가상화폐를 경고했다. 출처=트위터 |
지난 21일(현지시간) IT(정보기술)매체 테크크런치에 따르면 ICO를 명목으로 ‘Gramtoken.io’라는 스캠(사기) 사이트가 등장해 투자자가 지급한 500만 달러(한화 53억 5000만원) 상당의 가상화폐를 빼돌리는 사건도 발생했다. ‘Gramtoken.io’는 현재 가상화폐 제작을 준비하고 있는 텔레그램으로부터 유출된 백서를 이용해 프로젝트 로드맵, 팀 구성원 등을 허위로 만들어 투자자를 모았다. 현재 해당 사이트는 폐쇄된 상태다.
미국 회계법인 언스트 앤드 영도 지난 22일 보고서를 통해 ICO를 통해 조달된 자금 37억 달러(한화 3조 9597억원) 중 4억 달러(4280억원)는 증발하거나 분실되고 있다는 통계를 내기도 했다. 이런 위험성에 중국과 한국 정부는 지난해 7월부터 ICO 전면금지를 발표했지만 기업들은 해외에 본사를 두고 투자자들을 모으고 있는 실정이다.
허위 사이트를 만들어 가상화폐 투자자를 모은 사이트. 사진에 나온 개발자 사진은 영국 한 시골마을의 선생님 사진을 도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출처=트위터 |
블록체인 업계 관계자는 “페이스북 광고나 지인의 정보를 믿고 ICO에 투자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ICO에 참여하기 전 토큰(가상화폐)을 구매하는 플랫폼이 신뢰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투자자를 모집하는 플랫폼 내에서 제대로 된 검증이 이뤄졌는지 알아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국블록체인산업진흥협회 김태원 이사는 “ICO가 불법이지만 가상화폐의 P2P(개인간 거래)가 존재하는 한 막을 수 없다”면서 “ICO를 제도권 안에 들여올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김 이사는 “투자자들이 현재 ICO를 검증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개발자의 사생활까지 자체적으로 알아보는 상황”이라며 “스위스 같은 ICO 허용국가들은 기업 투자금의 사용처까지 감시하며 등급을 매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안승진 기자 prod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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