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계좌가 익명계좌라는 점 악용… 금융당국 "통제할 방법 없다"
(사진=연합뉴스) |
NH농협은행, IBK기업은행, KB국민은행, 신한은행, KEB하나은행, 광주은행 등 6개 은행은 지난 30일부터 가상화폐 거래계좌 실명확인 시스템을 실시했다. 가상화폐 투자자는 반드시 이들 은행 중 한 곳에 실명으로 계좌를 개설해야 하며 그 계좌가 가상화폐 거래소에 등록된 계좌와 동일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은행은 기존 투자자에게만 실명계좌를 만들어줄 뿐, 신규 투자자에게는 계좌 제공 자체를 거절하고 있다. 은행 측은 “자금세탁 방지 가이드라인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할 때까지 일시적인 조치”라고 밝혔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결국 가상화폐 거래 활성화를 원하지 않는 정부의 눈치를 보는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또 가상화폐 거래에 쓰이던 기존 가상계좌에는 입금이 불가능하다. 다만 지난해말까지 선입금된 돈으로 계속 거래를 할 수 있으며 출금도 가능하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어우러져 금융당국과 은행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풍선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가상화폐 기존 투자자와 신규 투자자가 서로 계좌를 거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 가상화폐 투자자는 “기존 투자자가 신규 투자자에게 자신이 쓰던 가상계좌의 계좌번호와 비밀번호 등을 넘겨주는 대신 선입금액에 웃돈을 얹어 받는 형태로 거래가 이뤄진다”며 “웃돈은 대개 20~30% 정도”라고 설명했다. 해당 계좌에 현재 입금된 금액이 1억원이라면 신규 투자자가 1억3000만원을 지불하고 계좌를 사는 식이다.
또 다른 투자자는 “가상계좌의 최고 장점은 익명거래가 가능한 점”이라며 “이미 연초부터 실명거래를 꺼리는 신규 투자자들이 기존 가상계좌를 매입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은행으로부터 계좌 개설을 거절당한 사람들까지 뛰어들면서 시장이 넓어진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시장이 열릴 줄 예상해 더 이상 가상화폐를 거래할 생각이 없음에도 계좌를 유지해둔 사람이 꽤 많은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거래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되는데 주로 인터넷 카페나 소셜네트워크(SNS)를 통한 비대면거래가 선호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음지의 거래가 유행하면서 정부의 가상화폐 규제가 빛이 바래지는 모습이지만 가상화폐 거래소나 금융당국은 딱히 방법이 없다는 태도다.
가상화폐 거래소 관계자는 “아직 가상계좌를 유지하고 거래하는 투자자가 수십만명은 되는 듯하다”면서도 “가상계좌는 익명의 계좌라 우리로서는 소유주를 확인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투자자들끼리 가상계좌를 사고파는지 여부도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도 “가상계좌를 통해 이미 거래소로 들어간 자금은 인터넷상에서만 존재하는 자금인 만큼 마땅히 통제할 방안이 없다”며 손을 놓은 듯한 모습이다.
가상계좌 거래는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자칫 탈세, 자금세탁 등의 범죄행위에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이 더 큰 위험요소다. 가상화폐 거래 실명제가 자리잡기 위해서라도 가상계좌를 통한 거래 자체를 틀어막아 버리는 규제가 요구되고 있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
<세계파이낸스>세계파이낸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