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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미의영화산책] 비워야 보이는 삶의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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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7-27 22:10:05 수정 : 2018-07-27 22: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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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승을 부리는 폭염 더위가 말복이라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도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도 많다. 더구나 회사 경영이 어려워 구조조정을 앞두고 있는 경우라면 휴가는 꿈도 못 꿀 형편일 것이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감독 벤 스틸러)는 구조조정의 압박 속에서 본의 아니게 멋진 자연 풍광이 펼쳐지는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히말라야까지 가게 된 잡지사 포토 에디터 월터 미티(벤 스틸러)가 주인공이다.

월터는 자기소개에 쓸 만한 멋진 곳에 가본 적도 없고, 남다르게 해본 것도 없이 소심하게 살아가는 솔로이다. 직장 내에서 매일 스쳐지나는 사랑하는 여인에게는 고백조차 못하지만, 유명 사진작가 숀(숀 펜)이 보내오는 사진으로 표지를 만드는 일은 성실히 해 내는 사람이다. 인터넷 잡지로의 전환을 위해 대규모 구조조정을 감행하게 되는 중요한 때에 마지막 호 표지가 될 숀이 보내온 ‘25호’ 사진이 사라진다. 제목은 ‘삶의 정수’. 2주 내에 사진을 찾아오지 못할 경우 퇴출 1호가 될 월터는 세계를 떠돌아 다니느라 연락조차 어려운 사진작가 숀을 찾아 떠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히말라야 중턱에까지 올라가서야 월터가 만나게 된 숀은 마침 겨울 눈표범을 렌즈에 포착하던 순간이었다. 언제 찍을 거냐고 묻는 월터에게 숀은 카메라로 방해하고 싶지 않다며, 정말 만나기 어려운 장면은 찍지 않고 그 순간에 머문다며 피사체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다.

영화는 ‘삶의 정수’라는 화두를 통해 눈앞의 현실에 갇혀 그 너머를 볼 줄 모르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삶의 정수는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비어 있는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가 보르헤스는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이라는 단편소설에서 “칭다오대학의 영문학 노교수였던 유춘 박사가 구술한 뒤 검토하고 서명한 아래의 진술은 그 사건의 진상을 명백하게 밝혀주고 있다. 처음 두 페이지는 소실되고 없다”고 서술하고 있다. 소실된 내용에 진실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월터가 오래도록 찾아 헤매던 25번 사진이 바로 그의 곁에 있었다는 것은 비우고 나서야 보이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살인적인 폭염을 이기는 법은 더운 현실을 넘어서 숀처럼 자신이 빠질 수 있는 아름다운 순간에 머무는 것, 즉 삶의 정수를 찾는 것일지도 모른다.

황영미 숙명여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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