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넘게 대한항공을 이끌어 온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27일 주주들에 의해 사실상 불명예 퇴진하게 되자 대한항공 인사들은 망연자실했다. 아들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이 당분간 회사를 이끌 것으로 전망된다. 한진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한진칼 주주총회(29일)에서 논의할 조 회장 측근 석태수 대표이사 연임 여부가 이후 그룹의 항로를 가늠할 시금석으로 여겨진다.
대한항공은 충격적인 주총 이후 말을 아꼈다. 조 회장 퇴진으로 공석이 된 사내이사 대책과 관련, “아직 어떻게 말할 단계가 아니다. 향후 절차에 따라 논의할 것”이라는 원론적인 입장만 밝혔다. 대한항공은 다만 “조 회장이 사내이사직을 상실한 것은 맞지만, 경영권 박탈은 아니다”라는 입장을 내놨다. 조 회장이 여전히 대한항공의 최대주주이고, 그룹 지주사인 한진칼을 통해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한항공 사내는 종일 뒤숭숭했다.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 주주총회장에 들어가지 못한 직원들은 복도에 마련된 TV에 시선을 집중했다. 조 회장과 조 사장은 주총에 참석하지 않았다. 조 회장은 건강상의 문제를 들어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남쪽의 대표적 부촌인 뉴포트비치 별장에서 칩거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상장사와 다른 대한항공의 특별한 정관이 조 회장의 발목을 잡았다는 말도 나왔다. 대한항공은 정관상 이사 선임과 해임을 특별결의사항으로 분류해 주총 참석 주주의 3분의 2 이상 동의를 받도록 하고 있다. 통상 과반수 찬성표만 확보하면 되는 다른 회사보다 요건이 까다롭다. 대한항공 정관도 1999년까진 일반 상장사들의 이사 선임요건과 같았는데,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때 외국계 자본의 공격을 막기 위해 1999년 요건을 변경한 것이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는 설명이다.
조 회장이 물러나면서 회사는 ‘조원태 체제’로 재편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에게는 본격적인 리더십 및 역량 발휘의 시험대다. 오너일가 중 유일하게 대한항공 이사회에 남게 된 조 사장은 2021년까지 사내이사 임기가 남아있다.
한진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한진칼 주총이 첫 시험대인데 일단은 오너일가에게 유리하다. 석태수 대표이사 연임 안건이 의안으로 올라오는데, 조 회장 일가 경영에 반대하는 행동주의 사모펀드 KCGI는 석 이사 연임에 반대한다. 한진칼 지분 구조는 조 회장 및 특수관계인이 28.93%로 가장 많고, KCGI 측이 12.8%, 국민연금이 6.7%를 갖고 있다. 3분의 2 이상 찬성이 필요했던 조 회장 연임건과 달리 석 대표 연임은 과반수 찬성으로 의결이 가능하다. 조 회장 연임 부결을 이끌었던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는 이날 회의에서는 석 대표 연임에 찬성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ISS 등 일부 의결권자문사에서 석 대표 연임을 반대하고 있어 연임 부결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 조 회장 일가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이날 대한항공과 한진칼 주식은 전날보다 각각 2.47%, 0.39% 오르며 장을 마감했다. 온갖 논란에 휩싸였던 한진그룹 오너일가의 ‘얼굴’ 격인 조 회장이 물러나자 자본시장이 이를 호재로 인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조 회장 일가는 2014년 조 회장의 장녀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을 시작으로, 부인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의 ‘갑질’ 논란, 둘째 딸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컵 갑질’ 논란 등 여러 차례 논란을 빚어왔다. 조 회장은 횡령·배임 등의 혐의로, 이 전 이사장과 조 전 부사장은 밀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고 미국 국적인 조 전 전무는 진에어 등기임원을 지냈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진에어가 국토부로부터 신규노선 불허 조치를 받기도 했다.
◆'주총 거수기' 꼬리표 떼고 존재감 과시한 국민연금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안 부결은 사실상 국민연금이 ‘결정타’를 날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종이호랑이’로 불렸던 국민연금이 이번엔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다.27일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조 회장 연임안은 찬성 64.1%, 반대가 35.9%였다. 11.56%의 지분을 가진 국민연금은 이날 반대표를 던졌다. 전날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를 열고 “기업가치 훼손 내지 주주권 침해 이력이 있다고 판단된다”며 반대하기로 결정한 데 따른 것이다.가결까지 불과 2.5%포인트 모자란 상황에서 만약 국민연금이 찬성했거나 기권했다면 결과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날 미리 반대 입장을 밝힌 국민연금에 외국인 일부, 소액주주 등이 동조하면서 그룹 총수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한 것이다.
각종 전횡에도 대기업 오너가 퇴출당한 사례가 거의 없던 한국에서 이번 결과는 의미 있는 ‘사건’으로 볼 수 있다.국민연금은 지난해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지침)를 도입한 이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 2월 기금운용위원회를 열고 한진칼에 대해 정관 변경 주주제안을 하기로 의결했다. 이어 남양유업에는 배당 확대를 요구했다.국민연금이 10% 이상 지분을 가진 기업이나 국내주식 자산군 내 보유 비중이 1% 이상인 기업의 전체 주총 안건과 수탁자책임위에서 결정한 안건에 대해서는 주총 전에 찬반 의견을 공시하고 있다.3월 주총 시즌을 맞아 국민연금은 주요 기업들의 주총 안건에 대해 잇달아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사내·사외이사 선임안, 효성·신세계·현대건설·기아자동차 등의 사외이사 선임안에는 감시의무 소홀 책임 등을 이유로 들어 반대했다. 또 LG상사·한국전력공사 주총에서는 이사 보수한도 승인에 반대 의견을 냈다.
기업 실적을 고려할 때 과도한 보수라는 이유에서다.국민연금의 반대가 모두 관철된 것은 아니다. 해당 안건들은 모두 주총에서 통과됐다. 그러나 국민연금이 반대했다는 자체만으로도 다른 주주들이 안건에 대해 재검토할 기회를 제공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기업들도 달라진 국민연금의 태도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기업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안상희 대신지배구조연구소 본부장은 “이번 사례는 국민연금이 주총에서 총수 일가 관련 안건에 반대한 사례 가운데 처음으로 부결된 것”이라며 “앞으로 다른 기업들도 기업가치 훼손 이력이 있는 총수 일가의 선임 안건에 대해서는 긴장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 “국민연금, 기업 경영권 흔들기 안돼”
재계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국민연금과 외국인 주주 등의 반대로 사내이사에서 밀려난 데 당혹감과 충격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경영계 단체는 국민연금의 경영 개입을 비판하면서 이번 사태가 자칫 ‘연금사회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이날 배상근 전무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특히 국민연금이 이번 결과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는 그동안 조 회장이 대한항공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노력해 왔다는 점은 고려하지 않은 결정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어 “주주들의 이익과 주주가치를 감안해 신중한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논란을 이유로 연임 반대 결정을 내린 데 대해 우려스럽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전경련은 또 “사법부가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해야 한다는 대원칙에도 반하는 결과일 뿐만 아니라 국민연금이 민간기업의 경영권을 좌지우지하게 된다는 ‘연금사회주의’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있는 만큼 보다 신중했어야 했는데 아쉽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대한항공이 이번 사태를 빠르게 수습하고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길 바란다”며 “나아가 우리 기업들이 장기 안정적 투자를 할 수 있도록 기업경영권이 더 이상 흔들리는 일이 없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한국경영자총협회도 조 회장의 연임 부결에 대해 “대한항공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며 “이에 대해 경총은 심대한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경총은 “공적연금이 기업 경영에 대단히 중요한 사내이사 연임 건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주주가치 제고, 장기적인 기업의 성장 등 관련 제반 사안에 대한 면밀하고 세심한 검토가 선행돼야 한다”며 “국민연금이 조 회장 건을 심의한 과정을 보면 심도 있는 논의 없이 여론에 휩쓸려 결정됐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경총은 “국민연금은 투자기업의 자유로운 경영활동 보장을 통해 주주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중심을 잡아야 한다”며 “국민연금이 기업경영권을 흔드는 일이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재계는 이번 조양호 사태를 계기로 국민연금뿐 아니라 미국계 행동주의 펀드인 엘리엇 등이 지배구조가 취약한 기업을 상대로 단기 차익 실현을 위한 경영권 공격에 나서는 사례가 빈발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올해 주주총회를 앞두고 주요 기업들은 주주 친화적 정책을 내놓는 등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엘리엇의 경영권 개입 공세에 맞서 현대자동차는 지난주 주총을 앞두고 ‘CEO 인베스터 대회’를 개최하면서 주주들을 우군화했다. SK텔레콤은 박정호 사장과 4대 사업부장이 직접 프레젠테이션과 질의응답을 진행했다. 주총 개회 전에는 주주를 대상으로 티움(T.um) 전시관 투어를 통해 최첨단 정보통신기술(ICT)과 5G 서비스를 소개했다.
이도형·이진경·이우중 기자, 워싱턴=정재영 특파원 scop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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