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야당인 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신설의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전 상정) 처리 합의안을 도출하면서 공수처라는 새로운 권력기관의 등장이 가시화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패스트트랙 합의에 불참한 자유한국당은 물론 민주당, 바른미래당 등에도 공수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어 정식 입법까지 험로가 예상된다.
요즘 수사권 조정을 둘러싸고 검경이 벌이는 난투극만 봐도 아찔할 지경인데 여기에 새로운 수사기관이 하나 추가되면 서로 ‘내가 제일 세다’고 주장하는 권력기관들의 힘자랑이 1년 내내 지속되리란 우려도 적지 않다.
◆"공수처, 민변 출신으로 가득 채워진 한국판 게슈타포"
24일 정치권에 따르면 바른미래당 오신환 의원은 공수처 법안 패스트트랙의 첫 관문인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에서 반대표를 던질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
공수처 법안이 패스트트랙을 타려면 의원 18명으로 구성된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사개특위)에서 재적 위원 5분의 3(11명)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사개특위의 여야 4당 의원 수는 11명(민주 8명, 바른미래 2명, 평화 1명)이어서 단 한 명의 이탈만 있어도 패스트트랙은 물 건너간다.
원래 공수처 신설에 부정적이었던 오 의원은 이날 기자들에게 보낸 문자에서 “공수처 설치안의 신속처리안건 지정안에 반대표를 던지겠다”고 공언했다.
제1야당인 한국당은 당론으로 공수처 신설에 반대하고 있다. 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공수처 설치는 공포정치 시대의 개막으로 또 다른 방법의 검찰 권력, 법원 권력, 경찰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라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출신으로 가득 채워진 한국판 게슈타포가 연상된다”고 꼬집었다.
게슈타포란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1930∼1940년대 나치 정권 시절의 독일 비밀경찰을 뜻한다.
“검찰을 개혁하면 되지 굳이 공수처를 만들 필요가 있느냐”는 시각은 여당인 민주당 내에서도 감지된다. 검사 출신인 민주당 금태섭 의원은 “권력기관인 사정기구를 또 하나 만드는데 반대한다”며 “기존 권력기관의 권한과 힘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가야지 또다른 특별 권력기관을 만드는 것은 시대적 과제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다만 금 의원은 공수처 설치 패스트트랙이 당론으로 정해진 이상 반대하진 않겠다는 입장이다.
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은 공수처 신설 패스트트랙 합의안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 친인척이나 주변 권력을 견제하는 기구로서 공수처를 생각해왔는데, 그것이 안 된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할 것”이라고 말했다.
◆검경 다툼에 공수처까지… 수사기관들 간 암투 불가피
사실 법조계에는 금 의원과 같은 생각을 가진 이가 많다. 부장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검경과 별개의 새로운 수사기구가 생기면 사정기관 상호 간 주도권 다툼도 예상되며 인력·장비의 중복 등에 따른 국민 혈세 낭비가 불가피해진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검경과 별도의 부패전담 수사기관을 두고 있는 외국은 수사기관들끼리 단순한 갈등을 넘어 정면충돌까지 빚은 사례가 허다하다. 인도네시아는 부패근절위원회(KPK)라는 부패전담 수사기관이 있다. 2009년 KPK가 경찰 고위간부에 대한 수사 계획을 밝히자 경찰은 KPK 위원장을 살인교사, 부위원장을 직권남용과 뇌물수수 혐의로 전격 체포했다. 결국 KPK는 한동안 제대로 된 업무 처리가 불가능해졌다.
2012년 KPK가 경찰 고위간부의 뇌물수수 단서를 잡고 해당 경찰서를 압수수색하자 경찰이 KPK 팀장급 간부의 8년 전 비위 의혹을 들어 수사하는 등 반격에 나섰다. 경찰은 보복 조치 일환으로 KPK에서 파견근무를 하던 경찰관을 전부 복귀시켜 KPK의 업무를 마비시켰다.
2015년 KPK가 신임 경찰청장 후보자를 비리 수사 대상으로 지목하자 경찰은 되레 KPK 부위원장을 위증 혐의로 체포했다. 결국 대통령이 나서 KPK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교체했다.
홍콩의 염정공서(廉政公署·ICAC) 역시 검경과 별개의 독자적 수사권을 갖춘 기관으로 부패범죄나 공직자 등의 권력 남용을 주로 담당한다. 그런데 2005년 ICAC 소속 수사관이 홍콩의 한 고급 호텔 레스토랑 귀빈실에 도청장치와 몰래카메라를 설치한 사건이 벌어졌다. 같은 해 또다른 ICAC 수사관은 뇌물수수 현장을 잡겠다며 형사사건 의뢰인과 변호인의 미팅 현장을 도청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한 전직 검사는 “수사 단서 확보가 어려운 상황에서 조직 생존을 위한 가시적 성과 도출에만 급급하다 보니 생겨난 부작용”이라고 풀이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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