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크림파스타를 먹던 날을 기억한다. 양식이 일상이 아니던 시절, 첫 크림파스타는 숙취에 시달리던
그날에도 마음을 따듯하게 해주었다. 이탈리아의 카르보나라(까르보나라)가 미국으로 넘어가 다시 한국의 소스 가득한 파스타로 자리 잡기까지의 여정은 흥미롭다. 오늘은 삶은 면을 그라나 파다노 치즈와 약간의 크림에 버무려 준 뒤 콩피한
노른자를 곁들여 본다. 크림은 폼을 만들어 노른자, 면과 버무려 먹으면 녹진한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로마의 휴일과 크림파스타
내가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흑백영화는 바로 ‘로마의 휴일’이다. 마치 머릿속에 각인된 것처럼 서양 음식에 막연한 동경이 생기게 된 영화이다. 그레고리 펙 그리고 오드리 헵번의 연기와 그 표정들은 생각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따뜻한 영화인데 그 둘이 함께 거니는 유럽, 로마의 배경은 상당히 어린 시절에 보았던 내게도 굉장히 신기하고 아름답던 기억이 난다. 처음 요리를 시작했을 때엔 양식이라고 하는 유럽 음식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서양 음식은 그런 영화 같은 다른 세상의 이미지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내가 유럽요리를 하게 된 것은 크림파스타 덕분이다.
내가 자란 동네는 서울 중랑구 면목동의 동부시장 근처다. 오래된 뉴월드예식장이 있었고(지금은 영화관이 생겼다) 바로 옆 새서울극장 앞 노점에선 오징어 굽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던 곳이다. 지금은 완전히 바뀌어 가끔 어머니의 사진 앨범을 돌아보며 추억을 회상하고는 한다. 그 동부시장 끝자락 2층에 어느날 이탈리아 음식집이 생겼다. 지금은 이름도 생각나지 않지만 제법 세련된 인테리어가 인상 깊었던 레스토랑인데, 대체 왜 이 동네에 이런 레스토랑이 생긴 걸까 하고 동네 사람들 모두 의아해했었다.
경양식집의 돈가스가 익숙하던 내게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조금, 아니 꽤 높은 벽이었다. 언젠가 한번 가봐야지 하며 무심히 지나다니던 시간이 1년 정도가 되었을까. 입대한 친구 녀석이 100일 휴가를 나와 술자리를 함께했는데 얼큰하게 취한 친구가 그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꼭 가보고 싶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술김에 약속했다. 다음날 술이 덜 깬 몸을 이끌고 레스토랑을 찾아갔는데 입구에 들어서자 멋진 화덕이 눈에 띄었고 반쯤 오픈 된 주방엔 멋진 주방 모자를 쓴 요리사가 서 있었다.
직원 추천으로 정한 메뉴는 카르보나라와 포모도로(뽀모도로). 카르보나라는 전형적인 한국형 크림파스타처럼 크림소스가 듬뿍 나왔다. 해장에는 순대국과 뼈해장국이 최고라고 몸으로 배워왔던 내 고정관념을 깨부수듯이 크림파스타의 부드럽고 고소한 소스는 내 몸을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 술안주집 요리사가 아니라 요리학교를 졸업한 뒤 서양음식 요리사로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런 추억 때문이다.
#국물 자작한 한국형 크림파스타
이탈리아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대표적인 크림파스타에 대해 묻는다면, 많은 사람이 카르보나라라고 대답할 확률이 높다. 요즘 들어서야 크림파스타에 새우나 고기, 그 외에 다양한 재료를 많이 넣지만, 대부분 노른자가 들어간 고소한 카르보나라가 먼저 생각날 것이다.
카르보나라는 ‘석탄’이란 뜻의 이탈리아어로 이탈리아 중부지방 음식이다. 광부들이 애용하던 파스타에서 유래됐다고 하는데, 검정 후추를 으깨어 뿌려 먹는 그 모양새가 광부들의 몸에 붙어 있는 석탄가루가 뿌려진 것 같아 이렇게 불렸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카르보나라에는 크림이 들어가지 않는다. 절인 돼지고기인 판체타와 노른자, 페코리노 로마노 치즈로만 만들어 먹는 게 일반적인데, 한국에서는 일단 크림이 듬뿍 들어간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피폐해진 삶에 지친 이탈리아의 많은 사람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당연히 그들의 음식 문화도 자연스럽게 따라갔다. 그 당시 미국은 값이 싼 고기를 쉽게 구할 수가 있었고 많은 이탈리아 사람은 그 고기로 이탈리아 현지 음식들을 재현해 내기 시작했다. 그중 카르보나라도 미국으로 오게 되면서 현지인의 입맛에 맞게끔 변형돼 지금의 크림이 들어간 파스타가 됐다. 그 크림이 들어갔던 파스타가 한국으로 온 뒤 우유와 육수를 더 넣어 국물이 자작한 한국형 카르보나라가 탄생했다. 우리나라의 국물 문화가 파스타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탈리아 현지에선 크림을 넣은 카르보나라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문화적으로 보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김치찌개에 우유나 꿀 같은 것을 넣는 개념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물론 요즘에는 한국에도 정통 카르보나라를 하는 곳도 많이 생겼다. 녹진하고 고소한 그 파스타의 맛을 내는 곳들 말이다. 나 또한 그런 녹진한 카르보나라를 좋아한다. 하지만 크림소스 가득한 한국의 카르보나라가 생각날 때가 더 많다.
■한국형 카르보나라 만들기
■재료
삶은 스파게티면 130g, 그라나 파다노 치즈 15g, 노른자 1개, 생크림 50mL, 우유 100mL 베이컨 15g, 마늘 2톨, 면수 또는 치킨 육수 50mL, 향이 좋은 올리브유 15mL, 소금 1꼬집, 통후추 1꼬집
■만드는 법
① 생크림과 노른자는 섞어 놓는다. ② 팬에 손질한 베이컨과 마늘을 볶아 향을 내준다. ③ 면을 넣고 볶아 준 후 치킨 육수를 넣고 살짝 끓여준다. ④ 우유를 넣고 간을 해주며 끓여준다. ⑤ 절반의 파마산 치즈 가루를 넣고 끓여 주다가 불을 끄고 노른자가 섞인 크림을 넣고 버무려 준다. ⑥ 향이 좋은 오일을 뿌려 준 뒤 파마산 치즈와 후추를 뿌려 마무리해 준다.
오스테리아 주연·트라토리아 오늘 김동기 오너셰프 payche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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