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기억연대’(정의연)가 지난 30년 가까이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하고 피해자 할머니를 대변할 수 있는 원동력은 ‘피해자 중심주의’였다. 침묵하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데 앞장섰던 정의연은 피해자와 국민의 신뢰 속에서 위안부 운동을 대표하는 단체가 됐지만 정의연이 대표성에 집착하는 동안 초심을 잃고 ‘정의연 중심주의’에 매몰됐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을 계기로 정의연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이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던 것처럼 정의연의 전신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도 비슷한 사건을 겪었다. 2008년 별세한 위안부 피해자 고(故) 심미자 할머니는 33명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와 함께 ‘무궁화할머니회’를 만들어 “정대협은 우리를 앵벌이로 판 악당”이라고 2004년 공개 비판했다. 심 할머니의 주장은 2005년 극우성향 논객인 지만원씨와 인터뷰를 통해서도 공론화됐지만 정대협은 ‘앵벌이’라고 위안부 피해자를 모욕한 지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이후 심 할머니의 주장에 대한 조명보다는 명예훼손을 둘러싼 공방으로 논란이 이어지며 극우성향과 진보성향 시민단체들의 갈등으로 퍼졌다.
심 할머니는 2006년 유언장에서 정대협과 당시 사무총장이던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당선인을 향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피 빨아먹고 이를 팔아 긁어모은 후원금은 정대협 윤미향에게 지불해도 우리에게는 한 푼도 안 돌아왔다. 윤미향은 수십 개 통장을 만들어 전 세계에서 후원금을 받아 부귀영화를 누리고 떵떵거렸다”고 비판했다.
일본의 사과라는 대의명분과 도덕성에 기초한 정의연의 운동이 평화의 소녀상 건립과 여성인권운동으로 확산했지만 정작 정의연 밖의 위안부 피해자의 의견은 배척됐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후 위로금 수령을 놓고 당시 정대협의 반발이 거세자 주무부처인 외교부는 피해자 개별 접촉을 통한 설득에 나섰다. 정대협은 이를 두고 “피해자 갈라치기”라며 피해자 개별 접촉과 정부의 위안부 합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당시 생존자 46명 중 36명이 합의에 찬성해 위로금을 수령했다. 여성 인권·민족·제국주의 등이 복합적으로 뒤섞인 위안부 문제를 민족의 관점에서 접근해온 정의연의 입장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선택은 달랐다는 점을 시사한다.
위안부 문제를 연구해온 한 학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을 떠나는 분들이 늘고 정의연이 또 하나의 권력이 되면서 ‘정의연 입장=위안부 피해자’ 공식이 우리 사회에 자리 잡게 됐다”며 “위안부 피해자들의 생각은 균질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윤덕민 한국외대 석좌교수는 21일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정의연이 위안부 피해자를 도우면서 권리를 찾는 데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한 공이지만 이제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된 것 같다”며 “한·일 위안부 협의가 수포가 된 뒤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진척된 것이 없다. 정의연이 독점한 도덕성과 정의를 피해자 입장에서 다시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창훈 기자 corazo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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