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성추행을 당한 것으로 알려진 여성 측이 13일 기자회견을 열고 성추행의 구체적 내용을 소개한 뒤 진상규명을 요구한 가운데 침묵으로 일관하던 여당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에서 처음 ‘사과’ 발언이 나왔다.
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이날 오후 강훈식 수석대변인을 통해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것에 사과드린다”는 입장을 밝혔다. 강 대변인은 이 대표가 “예기치 못한 일로 시정 공백이 생긴 것에 책임을 통감한다.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의 아픔에 위로를 표한다”며 이같이 말했다고 전했다.
이 대표는 또 강 대변인을 통해 “당은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박 시장의 극단적 선택 직후인 지난 10일만 해도 박 시장의 성추행 혐의에 관해 묻는 기자를 향해 “그걸 이 자리에서 예의라고 합니까”라고 반문하며 “XX 자식 같으니”라고 욕설을 내뱉었던 이 대표가 180도 바뀐 것이다.
이는 이날 오전 박 시장 영결식이 치러지면서 장례 절차가 일단락된 점,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된 박 시장의 성추행 정황이 상당히 구체적이란 점, 박 시장의 사망으로 관련 형사사건 자체는 ‘공소권 없음’ 처분으로 끝나는 게 불가피하지만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무척 큰 점 등을 두루 감안한 결과로 풀이된다.
그간 민주당과 문재인정부의 주된 지지 기반이었던 여성계가 등을 돌린 것도 한몫 한 것으로 풀이된다. 전날(12일) 한국여기자협회가 성명을 내 정부·여당을 성토하고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요구한데 이어 이날은 한국여성변호사회가 가세했다. 여성 변호사들은 성추행 혐의를 받고 있는 박 시장 장례를 5일에 걸쳐 서울특별시장(葬)으로 치른 것은 부적절했다며 정부·여당을 질타했다. 피해 호소 여성에 대한 연대 입장을 밝히며 진상규명과 ‘2차가해’ 엄벌도 촉구했다.
이 대표와 달리 청와대는 여전히 박 시장 사건에 대한 입장 표명을 주저하는 분위기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원론적으로라도 청와대의 입장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별도로 드릴 말씀이 없다”고 답했다. 이는 섣불리 문 대통령이 ‘유감’의 뜻을 표명하기라도 했다간 이번 사태 파장이 향후 국정 운영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정무적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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