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아는 본인들끼리 서로 얘기해서 해결하는 게 제일 좋죠. 본인들끼리 어떻게 좀 해결했으면 싶어 연락했습니다.”
전 남자친구를 데이트폭력(상해) 혐의로 고소한 A(26)씨는 최근 사건을 맡은 서울동부지검 측으로부터 황당한 연락을 받았다. 이 사건을 수사한 서울 광진경찰서가 지난달 5일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한 직후, 동부지검의 검사직무대리라고 밝힌 이가 전화를 걸어왔다. 검사직무대리는 검찰 사무관이나 서기관 중 근무연수 등 일정 요건을 충족해 검사의 직무를 대리할 자격을 부여받은 이로서 기소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17일 A씨의 녹취록에 따르면 지난달 14일 검사직무대리는 5분 남짓한 통화에서 “사귀는 사이였으면 저희도 (사건을) 다루기 좀 그렇다”며 “치료비나 위자료를 달라고 하든지 본인들끼리 해결하는 게 제일 좋다”며 합의를 종용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이어 그는 “굳이 처벌하겠다고 하면 (조사는) 하겠는데”라며 “가해자와 연락은 안 되나. 합의 의사는 없는 거냐”고 말했다. 검찰은 2주 뒤인 같은 달 30일 고소 사건을 불기소 처분했다.
고소인 A씨에 따르면 지난 7월12일 오후 4시쯤 당시 남자친구였던 B(25)씨는 서울 광진구 A씨의 집에서 말다툼하던 중 A씨를 밀치고 집 밖으로 나가려는 과정에서 폭력을 행사했다. 갑자기 자리를 뜨려는 B씨의 행동에 당황한 A씨가 B씨의 손목을 잡자 그는 A씨의 양 손목을 비틀고 몸을 밀치며 팔로 목을 짓눌러 숨을 쉬지 못하게 하는 등 폭력을 행사하였다는 것이 A씨의 주장이다. B씨는 1차 폭행 이후 밖으로 나갔다가 1시간20분쯤 뒤 다시 돌아와 몸으로 여성인 A씨를 누르고 손톱으로 할퀴는 등 2차 폭행을 행사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로 인해 A씨는 전치 3주의 상해를 입었다.
검찰은 불기소 이유서에서 폭행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B씨의 폭행이 정당행위였다고 판단했다. 집을 떠날 B씨의 자유를 A씨가 손목을 잡음으로써 침해했기 때문에 이후의 폭행이 정당했으며 폭행의 정도가 사회 상규에 반하지 않는 수준이었다는 취지였다. A씨는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불기소 이유서에 적시된 진술은 대부분 피의자의 주장으로 피해자인 제 입장은 반영되지 않았다”며 “담당 검사직무대리가 5분 남짓한 통화 당시 사건을 잘 기억하지도 못하고 피식피식 웃는 태도를 보여 조서를 제대로 읽고 이해하기는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A씨는 항고를 제기해 사건은 지난 11일 서울고등검찰청에 이관됐다.
전문가들은 이 사건이 데이트폭력에 대한 검찰의 안일한 인식을 드러낸다고 지적했다. 최근 경남 양산과 부산에서 데이트폭력 사건이 잇달아 발생하고 폭행 장면 등을 담은 폐쇄회로(CC)TV 영상이 퍼지며 데이트폭력 엄벌과 피해자 보호에 대한 국민적 요구는 크게 높아진 상황이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데이트폭력 신고 건수는 2017년 1만4136건, 2018년 1만8671건, 지난해 1만9940건으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유승희 원곡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손목을 잡은 것에 대한 정당한 대응으로 보기에는 폭행의 정도가 과하고 장소를 벗어난 이후 다시 돌아와 물리력을 행사한 것은 정당행위로 볼 수 없음에도 불기소 처분을 내린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장윤미 한국여성변호사회 변호사도 “사건 처분까지의 시간이 일반적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짧았고, 폭행의 발생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이를 정당행위로 판단한 근거가 상식적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동부지검은 “피의자 측에서 합의 의사를 밝혀 피해자 측에도 의사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연락한 것일 뿐”이라며 “피해자가 명시적으로 합의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무리하게 합의를 종용한 건 아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항고 수사가 진행 중이라 관련 정보가 모두 서울고검에 가 있어 정확한 내용 확인을 해주기는 어렵다”면서 “수사부서에서 정확한 통화내용을 기억하진 못하고 통상적인 과정으로만 기억하고 있지만, 원만한 사건 해결을 위해 피해자 의사를 확인하는 차원이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박지원 기자 g1@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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