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게 하늘은 동경과 호기심, 공포였으며 때로는 세상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지금의 기준에서 보면 초보적이고, 때로 얼토당토않은 것이기도 했지만 평안한 일상을 위해 하늘의 작동원리를 파악하는 것도 필요했다.
현전하는 다양한 천문기기는 이런 역사의 반영이다. 당대의 과학기술 역량이 집약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문화적 성취를 한껏 뽐낸 예술품으로 주목받는 것도 있다.
◆“백성에게 시간을 알려줘야”, 애민의 이념 품은 해시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미국의 한 경매에서 구매해 17일 공개한 ‘앙부일구’는 18∼1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해시계다. 지름 24.1㎝, 높이 11.7㎝의 크기에 4.5㎏ 정도의 금속제 유물이다. 지난 1월 이 유물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경매가 여러 번 취소되는 우여곡절을 거친 뒤 지난 8월에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재단은 “서울의 위도에서 정확한 시간을 읽을 수 있도록 제작된 것”이라며 “우수한 과학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동시에 정밀한 주조기법과 은입사, 용·거북머리 등의 뛰어난 장식 요소 등으로 높은 예술성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앙부일구는 유교 국가에게 임금에게 부여한 ‘관상수시’(觀象授時·하늘을 관찰해 백성에게 절기와 시간을 알려 줌)의 이념을 잘 보여준다. 처음 만든 이는 ‘애민의 군주’인 세종이었다. 실록에 따르면 1434년(세종16년)에 만들어 종묘 남쪽 거리와 혜정교 옆에 설치해 ‘공중용 시계’로 사용했다. 현대의 시각체계와 비교해도 오차가 거의 없고, 절후(節候·한 해를 스물 넷으로 나눈 기후 표준점), 방위, 일몰시간, 방향 등을 알 수 있도록 했다.
가로 3.3㎝, 세로 5.6㎝, 높이 1.6㎝ 크기의 휴대용 앙부일구도 전한다. 보물 852호로 지정되어 있는 것은 조선후기 미술계를 이끈 강세황의 증손자 강건이 만들었다. 강건의 큰아버지(강이중)와 아버지(강이오), 강건의 두 아들들까지 진주강씨 3대가 모두 시계 제작에 일가를 이루었다고 한다. 양반 명문가의 사람들이 기술로 이름을 드러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서양의 영향을 받은 ‘신법 지평일구’는 앙부일구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눈길을 끈다. 서양의 평면 해시계 방법으로 사각 돌판에 시각선과 계절선을 표기했다. 보물 839호로 지정되어 있는 지평일구는 중국인 이천경이 북경의 위도에 맞추어 1636년 제작한 것이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다 1645년 귀국한 소현세자가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 계승한 조선의 천문도
우리 별그림의 역사는 청동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인돌에 새겨진 게 시작이고, 고구려 벽화고분에서 도드라졌으며, 조선의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이르러 화려하게 꽃피웠다.
1395년 태조의 명을 받은 권근, 유방택 등 11명의 천문학자들이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국보 228호)을 제작했다. 북극을 중심에 두고 태양이 지나는 길인 황도(黃道)와 남북극 가운데로 적도(赤道)를 나타내었다.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별들이 총망라되어 1467개를 점으로 표시했다. 이를 통해 해, 달, 5행성(수성, 금성, 토성, 화성, 목성)의 움직임, 그 위치에 따라 절기를 구분할 수도 있다.
태조대의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이 닳고, 훼손되자 숙종대에 이를 본 뜬 ‘복각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보물 837호)이 제작됐다. 두 각석을 모본으로 한 여러 장의 탁본도 전한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청동기 시대 이래 이어져온 우리만의 별그림 특징이 살아 있다. 중국의 천문도와 달리 밝기에 따라 별의 크기를 다르게 새긴 것이 그렇다. 또 천문도의 중심에 해당하는 북극 주변은 14세기 한양에서 관측한 별자리를, 바깥쪽은 1세기 평양 근처에서 관측한 별들을 그려 계승의식을 분명히 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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