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우먼 콤플렉스’, 일과 가사 모두를 잘해야 한다는 강박은 여성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경제적 주체로서의 위상이 한껏 높아졌음에도 집안 일은 여성의 몫이라는 인식은 좀체 변하질 않아 여성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슈퍼우먼 콤플렉스는 뿌리가 깊다. 자본주의적 생활방식이 확산되면서 여성의 경제적 기여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 조선 후기, 여성은 집안 살림을 이끄는 주체이자 도덕성을 겸비한 인격체이어야 했다.
국립한글박물관, 한국국학진흥원이 최근 발간한 ‘여성, 한글로 소통하다-내방가사(조선시대 양반 집안의 부녀자들이 짓고, 읊은 문학의 한 형태) 속 여성들의 이야기’에 실린 대구대 백순천 교수의 논문 ‘경북 지역 여성 치산(治産) 가사 연구’는 당시 조선 여성들이 직면한 이런 현실을 밝혔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높아진 경제적 위상, 여전한 도덕적 규율
조선 후기에 이르면 경제적 주체로서 여성의 지위는 사뭇 달라진다.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가 적극적, 긍정적으로 평가의 대상이 된 것이다. 문제는 감당해야 할 몫이 한층 커졌음에도 여성이 갖춰야 할 것으로 기대된 도덕성과 그것에 대한 규율, 사회적 시선이 관대해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영남 지역 내방가사를 분석한 백 교수의 글은 이런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창설가’의 화자는 가난한 집에 시집을 와 재산을 관리하느라 적잖은 고생을 했음을 토로한다. 그런데 이런 고백과 더불어 학문을 다하지 못한 회한, 도덕을 갖춘 역사 속 인물에 대한 회고를 함께 표현했다. ‘능주구씨계좌록’ 속 화자는 시아버지, 남편이 죽은 후 남은 식구들을 건사하며 살림을 일으킨 여성이다. 이런 세월을 되돌아보며 그녀가 후손들에게 남긴 말은 “일가친척 돈목하고 인리노소 경대하라”는 인륜과 도덕의 강조다. 자신과 가문을 지키기 위해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면서도 윤리, 도덕을 훼손하지 않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
백 교수는 이런 내용 속에서 당시 여성들의 ‘중층적 의식’을 읽어낸다. 그는 “무한 반복되는 집안 노동과 사치를 경계해야 하는 자기 규율은 삶의 고단함과 감정의 소외를 낳기도 하지만, 이에 대한 사회적 인정은 자신을 도덕적 실천의 주체로서 스스로 자부심을 갖게 한다”며 “이런 여성의 태도를 가부장적 남성 권력의 강요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분석했다.
◆욕망 드러내고, 실현한 ‘경제 영웅’ 여성
강요되고, 내재화된 유교 윤리를 완연히 떨치진 못했으나 조선후기 여성은 현실을 냉정하게 수용하고, 노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치부(致富)에 나서는 문제 해결의 주체로서 종종 묘사된다.
몰락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대표적인 여성이 ‘덴동어미’다. 가혹한 세금으로 집안이 망한 뒤 유리걸식하게 된 덴동어미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남편을 설득해 악착같이 돈을 모은다. 덴동어미의 삶은 결국 비극으로 치닫지만 노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려 욕망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복선화음가’에서 화자인 이씨 부인은 길쌈과 삯바느질, 양잠 등의 의복 노동을 통해 재산을 모은다. 복선화음가는 당시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백 교수는 이에 대해 “여성의 경제 활동으로 인한 극적인 성공담의 재미도 중요하지만, 여성 향유층의 관심과 열광 속에는 문제적 현실을 돌파하는 ‘경제 영웅’이 여성 주체라는 점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더욱 컸을 것”이라고 밝혔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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