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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많은 사랑의 말을 품고 있는데"…투병 최정례 시인 별세

입력 : 2021-01-17 12:05:01 수정 : 2021-01-17 13: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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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에 캥거루가 있다면 믿지 않겠지요/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으니까요/ 캥거루가 새끼를 주머니에 안고 겅중겅중 뛸 때/ 세상에 별 우스꽝스런 짐승이 다 있네/ 그렇게 생각했지요/ 하긴 나도 새끼를 들쳐 업고/ 이리저리 숨차게 뛰었지만/ 그렇다고 내 속에 캥거루가 있다고 말하면/ 안 되겠지요/...나는 가끔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인데/ 캥거루 주머니에 빗물이 고이면 어쩌나 하는 식으로/ 우리 애들이 살아갈 앞날을 걱정하지요/...캥거루는 캥거루이고 나는 나인데”(‘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중에서)

 

캥거루를 보면서 캥거루 안에 깃든 우리 자신을 보라고 조곤조곤 말했던, 시와 산문의 경계에서 길이 깊은 애정으로 세상에 질문을 던져온 최정례 시인이 16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66세. 

 

1955년 화성에서 태어난 고인은 1990년 현대시학을 통해 문단에 등단했다. 시집으로 ‘내 귓속의 장대나무숲’, ‘붉은 밭’, ‘개천은 용의 홈타운’ 등이 있으며, 지난해 11월 마지막 시집인 ‘빛그물’을 펴냈다. 백석문학상, 현대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받았다.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병원이고, 발인은 18일 오전. (02)2227-7500.

 

시인은 갔지만, 그의 길이 깊은 시는, 언어는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 시인을 진정 아름답게 보내주고 싶다면 그의 시를 읽고 낭송할 것, 눈 맑게.

 

“병점엔 조그만 기차역 있다 검은 자갈돌 밟고 철도원 아버지 걸어오신다 철길 가에 맨드라미 맨드라미 있었다 어디서 얼룩 수탉 울었다. 병점엔 떡집 있었다 우리 어머니 날 배고 입덧 심할 때 병점 떡집서 떡 한 점 떼어 먹었다 머리에 인 콩 한 자루 내려놓고 또 한 점 떼어 먹었다 내 살은 병점 떡 한 점이다 병점은 내 살점이다 병점 철길 가에 맨드라미는 나다 내 언니다 내 동생이다 새마을 특급 열차가 지나갈 때 꾀죄죄한 맨드라미 깜짝 놀라 자빠졌다 지금 병점엔 떡집 없다 우리 언니는 죽었고 수원(水原), 오산(烏山), 정남(正南)으로 가는 길은 여기서 헤어져 끝없이 갔다”(‘병점(餠店)’ 전문)

 

경부선인가 지하철 1호선인가를 타고 가다보면 화성 부근 어딘가에서 언뜻언뜻 접하기도 했던 병점역. 시인이 탯자리를 묻은 곳이 화성이니까 아마 역으로 보면 병점역 언저리였을 것이다. 시 ‘병점(餠店)’에 대해서, 시인 이영광은 언젠가 “굉장히 빼어난 서정시인데, 기존에 우리한테 익숙한 서정시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쓰여 있었던 것”이라며 “견고한 시”라고 극찬한 적이 있다.

 

“수박은 가게에 쌓여서도 익지요/ 익다 못해 늙지요/ 검은 줄무늬에 갇혀/ 수박은/ 속은 타서 붉고 씨는 검고/ 말은 안 하지요 결국 못 하지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 봐요//...폭탄 구멍 뚫린 집들을 배경으로/ 베일 쓴 여자들이 지나가지요/ 퀭한 눈을 번득이며 오락가락 갈매기처럼/ 그게 바로 나였는지도 모르지요// 내가 쓴 편지가 갈가리 찢겨져/ 답장 대신 돌아왔을 때/ 꿈이 현실 같아서/ 그 때는 현실이 아니라고 우겼는데/ 그것도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요?”(‘레바논 감정’ 중에서)

 

검은 줄무늬의 수박은 속이 붉고 씨는 검지만 말을 못한다. 시인은 말 못하고 말이 전달되지 못하는, 흔한 여름의 과일 수박을 보면서 부조리한 질서에 울고 있는 레바논의 사람들을 보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 역시 레바논이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는 때론 쇼핑몰에서 우유며 고등어며 등을 사가지고 나며 걸려온 전화를 받으려다가 교통사고를 만나기도 했을 것이다. “플리즈 릴리즈 미”가 흘러나오는데, 혼란스런 사고를 드라마틱하게, 리얼하게 그려내는 다음의 시는 그것의 딱지일 터.

 

“그러니, 제발 날 놓아줘,/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든, 그러니 제발,// 저지방 우유, 고등어, 클리넥스, 고무장갑을 싣고/ 트렁크를 꽝 내리닫는데…/ 부드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플리즈 릴리즈 미가 흘러나오네/ 건너편에 세워둔 차 안에서 개 한 마리 차창을 긁으며 울부짖네// 이 나라는 다알리아가 쟁반만 해, 벚꽃도 주먹만 해 지지도 않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피어만 있다고/ 은영이가 전화했을 때// 느닷없이 옆 차가 다가와 내 차를 꽝 박네/ 운전수가 튀어나와/ 아줌마, 내가 이렇게 돌고 있는데/ 거기서 튀어나오면 어떻게 해/ 그래도 노래는 멈출 줄을 모르네// 쇼핑 카트를 반환하러 간 사람, 동전을 뺀다고 가서는 오지를 않네/ 은영이는 전화를 끊지를 않네// 내가 도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핸들을 꺾었잖아요/ 듣지도 않고 남자는 재빨리 흰 스프레이를 꺼내/ 바닥에 죽죽죽 금을 긋네// 십 분이 지나고 이십 분이 지나도 쇼핑센터를 빠져나가는 차들/ 스피커에선 또 그 노래/ 이런 삶은 낭비야, 이건 죄악이야,/ 날 놓아줘, 부탁해, 제발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날 놓아줘// 그 나물에 그 밥/ 쟁반만한 다알리아에 주먹만한 벚꽃/ 그 노래에 그 타령/ 지난 번에도 산 것을 또 사서 실었네// 옆 차가 내 차를 박았단 말이야 소리쳐도/ 은영이는 전화를 끊지를 않네/ 훌쩍이면서/ 여기는 불루베리가 공짜야 공원에 가면/ 바께쓰로 하나 가득 따 담을 수 있어/ 불루베리 힐에 놀러가서 불루베리 케잌을 만들자구// 플리즈 릴리즈 미, 널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든/ 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그러니 제발, 날 놔 줘.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놓아달란 말이야”(‘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전문)

 

시인은 멀리 떠났다. 그가 사랑한 말과 언어는 머나먼 별과 우주에 닿았을까, 아니면 우리별에서조차 주소를 찾지 못한 택배처럼 배회 중일까. 오늘 밤, 하늘에 별이 반짝이는데 캄캄하다면, 그럼에도 우리가 추위를 박차고 나와 그 많은 별을 본다면.

 

“하늘에서 그렇게 많은 별빛이 달려오는데/ 왜 이렇게 밤은 캄캄한가/ 에드거 앨런 포는 이런 말도 했다/ 그것은 아직 별빛이/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우주의 어느 일요일/ 한 시인이 아직 쓰지 못한 말을 품고 있다/ 그렇게 많은 사랑의 말을 품고 있는데/ 그것은 왜 도달하지 못하거나 버려지는가// 나와 상관없이 잘도 돌아가는 너라는 행성/ 그 머나먼 불빛”(‘우주의 어느 일요일’ 전문)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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