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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정부 검찰총장에서 野 대선후보로… 윤석열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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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11-05 15:06:22 수정 : 2021-11-05 15: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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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수 끝 사시 합격한 ‘신림 9동의 신선’… 검사가 천직
운명처럼 다가온 ‘조국 수사’…“수사 안 하면 우리가 검사냐”
통합의 정치·법치주의 회복…“정권교체 청사진 보여줘야”
사진=연합뉴스

“저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습니다.”

 

2013년 10월 2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국정감사장에서 당시 여주지청장이던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의 발언은 운명을 바꾸었다. ‘검사 윤석열’을 처음으로 대중에 각인한 순간이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 지시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시절 벌어진 국정원 댓글 사건 특별수사팀장에 임명된 윤 지청장은 상부 승인 없이 팀장 전결로 국정원 직원에 체포영장을 집행하고 압수수색을 했다가 직무에서 배제됐다. 

 

이후 두 번의 고검 발령으로 좌천 길을 걸었던 윤 후보는 2016년 국정농단 특검을 거쳐 2017년 5월 문재인정부 첫 서울중앙지검장으로 부활했다. 국정·사법농단 수사 등 박근혜·이명박정부를 겨냥한 ‘적폐청산’ 수사를 진두지휘한 윤 후보는 2019년 7월 검찰총장에 취임했다. 

 

“살아있는 권력도 수사하라”던 문재인 대통령의 말은 윤 후보에게 ‘조국 사태’라는 시험대에서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2019년 8월 조국 전 법무장관 일가의 사모펀드 불법투자·자녀 입시비리 의혹 등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를 지시한 윤 후보는 오히려 청와대·여당의 정치적 부담이 됐다. 윤 후보는 지난 3월 임기 만료를 넉달 앞두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지키겠다”며 검찰총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정치참여 선언 130일 만에 제1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9수 끝 사시 합격한 ‘신림9동의 신선’…검사가 천직 

 

윤 후보는 1960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한국 사회의 소득 불평등과 통계학 분야에 큰 업적을 남긴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로 친가의 고향은 충남 논산이다. 외가는 강원도 강릉이다. 충암고를 졸업한 윤 후보는 1979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대학 2학년 때 서울법대 동아리 형사법학회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모의형사재판에서 재판장을 맡아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가 석달간 외가인 강릉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지난 2013년 10월 21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검찰청에서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서울고검·서울지검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윤석열 당시 여주지청장이 증인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부친의 영향으로 교수를 꿈꿨던 윤 후보는 졸업을 앞두고 사법시험 1차에 처음 합격했다. 윤 후보는 사시 합격자 수가 100명에서 300명으로 늘자 “사시를 붙고 유학에 가야겠다”며 사시를 준비했으나 이후 2차 시험에서 연거푸 떨어지면서 9수 끝에 1991년에야 합격했다. 주변에 친구들을 몰고 다녔던 윤 후보는 숱한 일화를 많이 남겼다. 수험생 시절 후배들과 토론을 즐기며 술과 사람을 아껴 ‘신림9동의 신선’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사시 9수를 하면서도 상을 당한 친구를 위해 상여를 멨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강골 검사였던 윤 후보도 2002년 한때 검찰을 떠난 적이 있었다. 김대중 정권 말기 법무법인 태평양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태평양은 형사팀을 강화해 검찰의 공적자금 수사에 대한 기업인들의 변호를 주로 담당했다. 윤 총장은 검찰에서의 수사 경험을 바탕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항상 검찰을 그리워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마침 같은 법인에 있던 이명재 변호사가 검찰총장으로 복귀하면서 같이 검찰로 돌아왔다. 언론인 김창영이 쓴 ‘윤석열을 부르는 대한민국’이라는 책에서 당시 한 지인은 “윤 후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변호사 업계는 빡빡해서 검찰을 항상 그리워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수사 감각이 있고, 뚝심이 있는 데다, 검찰에 애정이 있었던 윤 후보를 옆에서 지켜봤던 이 총장이 복귀를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석열. 연합뉴스

◆윤석열의 리더십···‘사람에 충성 않는다’ 강골 기질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발언으로 상징되는 윤 후보의 강골 기질은 부친 윤기중 교수의 유전자에서 비롯된 듯하다. 대학교 입학 때부터 검사가 된 이후까지도 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는데, 인연을 소중히 해 지위가 달라져도 사람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말을 주변 사람들이 많이 했다. 부친 윤 교수는 연세대에서 통계학과를 만들어 경기 변동 예측 분야에 큰 업적을 냈지만 박사 학위가 없었다. 광복 후 전쟁을 거치며 어렵고 힘들던 시절에 다 그랬지만 체계적인 학위 코스를 밟지 못했던 교수들에게 정부는 ‘구제박사’ 제도로 기회를 줬지만, 윤 교수는 거절했다고 한다. “실력이 있으면 교수를 하는 것이고, 학위가 있어도 실력이 없으면 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허례허식에 물들지 않고 진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윤 교수의 평소 언행이 그의 어릴 적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수차례 정치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특유의 뚝심으로 이를 견뎠다. 신념과 용기가 없었으면 적당히 현실과 타협을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윤석열을 부르는 대한민국’에서는 이를 윤 총장의 우직함이라고 표현했다. 대학 시절 동기들끼리 저녁값 내기를 했는데, 한 친구가 현금이 없다며 본인이 총액을 카드로 계산할 테니 현찰을 달라고 하자 윤 후보가 그것이 바로 카드깡이라며 거절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윤석열(왼쪽부터), 조국, 추미애. 연합뉴스

◆운명처럼 다가온 ‘조국 수사’…“수사 안 하면 우리가 검사냐”

 

1994년 대구지검에서 첫 검사 생활을 시작한 윤 후보는 2002년 잠시 검찰을 떠나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1년 넘게 변호사로 근무하다가 다시 검찰로 복귀하면서 특수통 검사로 이름을 점차 알리게 됐다. 2003년 불법 대선자금 수사, 2006년 현대차그룹 비리, 2011년 부산저축은행 비리 등 굵직한 사건에 수사팀으로 참여하게 되면서다.  

 

문재인정부 출범 후 승승장구한 윤 후보는 검찰총장 취임 후 ‘조국 사태’에 맞닥뜨렸다. 2019년 8월 민정수석 재직 중 법무부 장관에 지명된 조 전 장관의 인사청문회 국면에서 야권과 언론을 중심으로 의혹이 쏟아졌다. 윤 후보는 당시 대검과 서울중앙지검 일부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관련 수사 필요성과 수사에 따른 우려 등에 대한 의견을 청취한 다음 “수사를 안 하면 우리가 검사냐”며 철저한 수사를 지시했다. 조 전 장관 수사를 계기로 문 정부와 윤 후보의 밀월 관계는 끝났다. 2019년 9월 ‘조국 사퇴’ 여론에 맞서 대검찰청 앞에서 펼쳐진 ’조국 수호’집회는 ‘문재인정부 검찰총장’이라던 윤 후보를 향한 여권 지지층의 분노를 상징했다. 

 

조 전 장관의 뒤를 이은 추미애 전 장관은 지난해 1월 취임사에서 “검찰개혁은 거스를 수 없다”며 대대적인 권력기관 개편을 예고했다. 윤 후보는 지난해 10월 국회 법사위의 대검찰청 국감에서 추 전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에 대해 “법리적으로 총장은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 ‘인사 대학살’에 대해서는 “전례가 없는 인사였다”고 작심 비판하면서 또다시 대중에 ‘검사 윤석열’의 이름이 각인됐다. ‘추·윤 갈등’은 윤 후보를 향한 직무정지와 정직 2개월 징계로 절정에 이르렀다. 추 전 장관은 지난해 11월 채널A 검언유착 사건과 한명숙 전 국무총리 사건의 감찰 방해·재판부 불법 사찰 등을 근거로 윤 후보의 검찰총장직 직무정지를 명령했다. 지난해 12월 법무부 검사징계위원회는 윤 후보에게 정직 2개월 처분을 결정했지만, 윤 후보는 두 차례 모두 행정소송을 제기, 가처분 신청이 인용되면서 총장직에 복귀했다. 


이창훈 기자 corazo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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