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동안 사람 발길 닿지 않은 머체왓숲길 원시 생명력 가득/한라산 배경 조랑말 두 마리 풀 뜯는 수채화 풍경 만나/유채꽃 프라자엔 은빛 억새 물결 출렁/웨딩 화보 촬영지로 인기
아주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나 보다. 돌과 나무는 얽히고설켜 한 몸으로 붙어 자란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올라간 편백나무와 삼나무. 햇살 한 줌 허용하지 않는 숲은 아주 고요하다. 들리는 것은 오로지 이름 모를 새소리와 바람에 부대끼는 나뭇잎 소리뿐. 눈을 감는다. 온몸으로 느끼는 꿈틀거리는 원시의 생명력. 고단한 삶을 치유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닌 미지의 세계, 서귀포 머체왓숲길에 섰다.
◆원시 생명력 살아 숨 쉬는 머체왓숲길
수도권은 갑자기 영하로 떨어지며 한겨울 속으로 빨려 들어갔지만 역시 제주는 봄인 듯 가을인 듯, 따사로운 햇살에 눈이 부시다. 겨울에도 늦가을 같은 날씨가 이어지니 겨울 여행에서 포근한 제주를 빼놓을 수 없다.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머체왓숲길 방문객지원센터를 지나자 동화 속 풍경이 펼쳐진다. 넓은 초원에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조랑말 두 마리. 가까이 다가가 쓰다듬어도 놀라지 않고 여행자의 손길을 즐기는 말들은 머체왓숲길의 마스코트. 원래 한 마리뿐이었는데 지난 2월 새끼를 낳아 식구가 늘었단다. 다행이다. 한 마리였으면 많이 외로웠을 텐데. 높고 푸른 하늘과 저 멀리 펼쳐진 한라산, 그리고 작은 오름들이 배경으로 펼쳐진 목가적인 풍경은 모든 여행자를 수채화로 만들어 버린다.
머체왓숲길의 또 다른 마스코트 느영나영 나무 아래서는 모녀가 다정하게 앉아 피크닉을 즐긴다. 느영나영은 ‘너랑 나랑’의 제주 방언. 동백나무와 조롱나무가 한 그루씩 가까이 붙어 자라다 가지가 서로 얽혀 하나의 나무가 됐다. 사람도 혼자서는 살아 갈 수 없으니 느영나영 서로 기대며 살자고 이런 이름을 붙였다. 한라산까지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 포토존.
드넓은 초원과 원시림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머체왓숲길의 ‘머체’는 ‘돌이 엉기정기 쌓이고 잡목이 우거진 곳’이라는 뜻이고 ‘왓’은 밭을 일컫는 제주 방언이다. 이 일대가 돌로 이루어진 밭이어서 머체왓이란 이름이 붙었다. 지형이 말 형태여서 ‘마체’ 또는 ‘머체’로 불리게 됐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크게 머체왓숲길과 소롱콧길 두 갈래로 나뉜다. 머체왓숲길은 방문객지원센터∼돌담쉼터∼느쟁이왓다리∼방애흑∼야생화길∼머체왓전망대∼산림욕숲길∼머체왓집터∼목장길∼서중천숲터널∼올리튼물∼참꽃나무숲길을 거쳐 방문객지원센터로 돌아오는 6.7㎞로 2시간30분 걸린다. 목장을 중심으로 한라산 아래 머체오름, 사려니오름, 넙거리오름 등 다양한 오름이 펼쳐진다. 조록나무군락, 구지뽕나무숲, 동백나무숲, 야생화꽃길, 삼나무숲, 편백숲이 어우러져 원시적인 생명력이 넘치는 치유의 숲이다. 소롱콧길은 일부 구간이 머체왓숲길과 겹치는데 방문객지원센터∼방사탑쉼터∼옛올레길∼머체왓움막쉼터∼머체왓편백낭쉼터∼소롱콧옛길∼중잣성∼편백낭치유의숲∼오글레기도궤∼서중천습지∼서중천전망대∼연제비도∼숲유치원을 거쳐 방문객지원센터로 돌아오는 6.3㎞로 2시간30분 거리다.
◆편백 피톤치드로 샤워하고 요가로 힐링
느영나영 나무를 지나면 50여년 동안 사람들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던 미지의 숲 소롱콧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편백나무, 삼나무, 소나무가 빽빽하고 제멋대로 휘어진 잡목까지 자라 빈틈을 찾기 힘들 정도로 아주 울창하다. 굵은 나무 몸통엔 줄기식물들이 착 달라붙어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한다. 소롱콧은 지형이 작은 용(소룡)을 닮아 이런 이름을 얻었다. 슬픈 전설이 전해진다. 수만년 전 제주에서 나고 자란 두 마리 형제 용 중 형은 말을 들어주는 것을 좋아하고 동생은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것을 너무나 좋아했단다. 한라산 화산이 폭발하는지도 모르고 동생은 신나게 떠들었고 형은 이야기를 들어주다 용암이 덮치면서 그대로 돌이 돼버렸다. 그래서 형제 용은 지금도 돌 안에서 살아 숨 쉬며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20여분 걷다 보면 형제 용의 흔적을 만난다. 숲길 비탈 아래에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듯,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여 길게 이어지는 개울이 놓여 옛이야기를 전한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지형.
조금 더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서자 이끼 낀 바위와 나무들이 뒤엉켜 곶자왈과 비슷한 태고의 신비가 펼쳐진다. 언덕길을 따라 양쪽 나무의 뿌리가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서로 엉켜 자연스럽게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사슴뿔 바위도 만난다. 사슴 머리를 닮은 바위를 뚫고 나무가 자랐는데 영락없는 사슴뿔 모양이다. 산불을 감시하는 초소를 지나 넓은 초원을 가로지르면 편백숲이 펼쳐진다. 잡목 하나 없고 오로지 편백만 끝없이 서 있는 풍경은 경이롭다. 누렇게 단풍 든 이파리는 해마다 쌓이고 쌓여 마치 톱밥을 깔아 놓은 듯하다. 맨발로 걸으니 어머니 품처럼 따뜻하고 푹신하다. 눈을 감고 걸으며 피톤치드를 폐 속 깊숙하게 불어 넣는다. 피톤치드는 면역력과 심폐 기능을 강화하고 심리적인 안정을 줘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니 오늘 밤은 아주 깊은 잠에 빠질 것 같다.
그렇게 사부작사부작 걸어 머체왓편백낭쉼터에 도착하자 요가 체험이 한창이다. 여행자들은 강사의 몸동작을 놓치지 않고 따라 하며 오랫동안 경직되고 틀어진 근육을 원래 자리로 되돌리는 중이다. 그 무리에 슬쩍 끼어 어려운 동작들을 따라 해본다. 큰일이다. 보기에는 쉬워 보이지만 굳은 몸이 좀처럼 따라주지 않는다. 강사의 도움을 받아 겨우 한 동작을 마치니 땀이 비 오듯 쏟아지지만 몸은 한결 부드러워진 것 같다. 몸이 더 굳기 전에 당장 집 근처 요가 학원에 등록해야겠다.
돌아 나오는 길에 왼쪽으로 접어들면 서중천전망대가 등장한다. 외계 행성에 도착한 듯, 건천 계곡을 따라 기암괴석이 펼치지는 풍경이 장관이다. 안내센터 쪽으로 길을 잡아 걷다 보면 올리튼물에 오리 두서너 마리가 둥둥 떠다니면서 한가롭게 물질을 한다. 서중천의 가장 큰 소(沼)로 가뭄에도 물이 풍부해 원앙새, 오리가 둥지를 틀고 살아간다. 올리, 올란이, 올랭이는 오리의 제주 방언이고 ‘튼’은 ‘뜨다’라는 뜻. 서중천을 따라가는 탐방로도 따로 마련돼 있다. 2시간 넘게 걸었더니 발이 아프다. 안내센터로 들어서자 여행자들이 족욕을 즐긴다. 편백 가루를 푼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고 차 한잔을 마시자 여행의 피로는 눈 녹듯 사라지며 졸음이 쏟아진다.
◆유채꽃 프라자엔 은빛 억새 물결 출렁
족욕으로 기운을 얻어 제주 은빛 억새를 즐기러 표선면 녹산로 유채꽃 프라자로 향한다. 녹산로는 제주를 대표하는 유채꽃과 벚꽃의 명소. 3월 말∼4월 초면 노란 유채꽃과 연분홍 벚꽃이 한꺼번에 피어 환상적인 풍경을 만든다. 워낙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다 보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퍼지기 시작한 2020년 봄에는 상춘객들이 아예 오지 못하도록 유채꽃밭을 갈아엎는 슬픈 일도 벌어졌다. 녹산로를 따라 끝까지 들어가면 유채꽃 프라자에 닿는데 요즘은 은빛 억새가 장관이다. 전망대에 오르자 광활하게 펼쳐진 억새 위로 해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억새 너머로 힘차게 돌아가는 풍력발전기들까지 어우러지는 풍경은 잊지 못할 낭만.
은빛으로 반짝이는 억새 사이로 걸어 들어간다.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휘적거리는 억새의 물결에 내 몸도 중심을 잃고 흐느적거린다. 억새는 해 질 무렵 역광으로 반짝반짝 빛날 때가 가장 낭만적이다. 이런 풍경 덕분에 웨딩 화보 촬영지로 인기가 높다. 다소 쌀쌀한데도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는 어깨가 드러난 웨딩드레스를 입고 모델처럼 웨딩 화보를 찍느라 추운 줄 모른다. 숫기 적은 예비 신랑은 좀 웃으라는 포토그래퍼의 핀잔에 멋쩍어하며 나름 멋진 포즈를 잡느라 진땀을 흘린다. 그래도 부럽다. 인생에서 가장 예쁜 나이를 살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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