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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르마시의 상징 안와르…30년 만에 총리에 [박종현의 아세안 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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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1-28 14:00:00 수정 : 2023-03-24 15: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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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취임 2개월 안와르 말레이시아 총리
이웃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태국 국빈방문 등 외교 반경 넓혀
25년 반정부 투쟁한 동남아 민주화의 상징
한국 DJ와 닮은 정치 역정·핍박과 투옥, 연정
아세안 내 위상 강화는 강점, 국내 연정 불안은 약점

동남아 지역 혹은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은 갈수록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동남아는 미·중 갈등이 디폴트(고정값)로 설정된 최근은 물론 2차례의 세계대전 시기에도, 더 거슬러 중세시대에도 각축의 공간이었다. 영국이나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미국 등 서양 강대국의 영향력이 커진 현대사 이전엔 중국과 인도가 번갈아가며 영향력을 높였던 지역이다. 이제는 수십 년 전 일본에 이어 한국도 동남아 지역에서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한국은 앞서 문재인정부에서 신남방정책을, 윤석열정부에서는 신인도·태평양 정책을 내놓았다. 한국의 대외무역 분야에서 베트남 등 아세안 회원국의 비중이 커졌으며, 아세안의 외교무대 발언권은 중요하다. 세계일보는 아세안 주요 지도자를 초청해 현안을 집중 토론하는 아세안포럼을 연례 개최해 왔다. 이런 관심을 바탕으로 아세안의 주요 일정과 인물을 짚는 <아세안 코너>의 부정기적 연재를 시작한다.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 세계일보 자료사진

말레이시아 10대 총리, 안와르 이브라힘이 최고권력자가 된 지 2개월이 지났다. 안와르는 지난해 11월 24일 말레이시아 국왕과 정당들의 여러 셈법에 따른 우여곡절 끝에 권좌에 올랐다.

 

그는 동남아시아 혹은 아세안(동남아국가엽합) 회원국에서 흔치 않은 민주주의의 상징인물로 거론된다. 촉망받던 젊은 정치인이었다가 차기가 유력시됐던 부총리에서 한때는 자신의 정치적 멘토로 역할을 했던 최고 권력자 마하티르 모하메드의 눈에 벗어나 투옥시절을 겪어야 했던 비운의 정치인이었다.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오른쪽)과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지난 9일 인도네시아 대통령궁에서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보고르=AFP연합뉴스

#동남아판 김대중·오바마의 정상회담

 

한창 국민적 지지를 받던 1990년대 초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갈랐던 외환위기가 닥친 1990년대 말이라는 시기를 고려하면, 그는 애초 예측보다 4반세기 늦게 총리가 됐다. 그의 역정은 흡사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모습을 닮았다. 권력자의 핍박, 투옥, 자신을 압박한 정치인과의 연정, 거의 차지할 뻔했던 국가수반의 자리를 아깝게 놓쳤다가 수년 뒤 다시 찾는 과정, 70대에 권좌에 오른 점, 민주화세대의 적극적 지지 등 흡사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안와르는 말레이시아 정치상황이 여전히 혼란스러운 와중에 지난 9일 이틀 일정으로 인도네시아를 국빈 방문해 양자 협력을 논의했다. ‘동남아의 오바마’ 별칭을 듣는 조코 위도도(조코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것이다. 양국 정상은 인도네시아 노동자 송출 문제, 국경 갈등, 아세안의 위상강화 등 현안에 전략적 접근법을 논의했다. 서로 요구하고, 양보할 내용이 여럿이었지만 두 정상은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카메라 앞에서 연신 웃음 띈 얼굴을 보여줬다.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왼쪽)가 지난 9일 인도네시아 대통령궁에서 이뤄진 정상회담에 앞서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운전하는 전동카드에서 대화를 하며 웃고 있다. 보고르=로이터연합뉴스

 

CNN인도네시아, CNBC인도네시아, 더띡닷컴(detik.com) 등이 생중계한 내용에 따르면 안와르는 정상회담과 포럼 기조연설, 별도의 기자회견 등을 통해 유연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였다. 인도네시아에 대해서는 형제국가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호의적 여론을 만들었다. 조코위 대통령을 향해서는 나이는 자신보다 젊지만, 훨씬 경험이 많다고 평가하는 등 여유러운 모습으로 웃음을 끌어냈다. 말레이시아보다는 영토가 넓고 복잡한 점이 많아 어려움이 많은 조코위가 인도네시아 국정을 책임지고 있다며, 자신이 배우는 점이 많다고 설명했다.

 

포럼 강연과 질문에서는 T. S. 엘리엇과 프랜시스 후쿠야마, 목타르 루비스, 타우픽 이스마일, 수카르노 등 여러 지도자들의 글과 작품을 언급했다. 동서양과 분야를 넘나드는 지적 관심의 지형도를 보여준 것이다. 이웃나라에서 온 민주화의 상징이 보여준 여유 넘치는 모습에 포럼 사회자를 비롯해 인도네시아 언론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인도네시아의 환영을 받은 안와르는 조코위에게 6월에 말레이시아를 방문해달라고 요청했다.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왼쪽)가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2018년 8월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을 인도네시아 보고르 소재 대통령궁에서 만나 환하게 웃고 있다. 보고르=AP연합뉴스

역대 총리의 관례대로 취임 이후 첫 방문지로 인도네시아를 택한 안와르는 오는 30일엔 반세기 전에 말레이시아에서 분리 독립한 싱가포르를 국빈 방문한다. 지난 17일 양국 외교부가 내놓은 공동발표문에 따르면 안와르는 나흘 일정으로 싱가포르를 방문해 정상회담을 갖는다. 싱가포르 정상의 답방은 3월에 이뤄질 것이라고 양국 언론은 전했다.

 

#40대에 부총리·재무장관, 마하티르 덕분에 날고 그 때문에 갇히고

 

안와르는 1947년 8월 동양의 진주로 불리는 페낭(Penang)에서 태어났다. 현재 75세인 안와르는 ABIM(말레이시아 이슬람 청년운동)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다가 집권연립의 중추였던 UMNO(통일말레이국민조직)에 1982년 입당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안와르는 당시 총리였던 마하티르의 총애를 받으며 여러 부처에서 장관직을 수행하며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40대 중반의 나이였던 1991년 재무부 장관에 임명됐다가 1993년엔 부총리에 지명돼 마하티르의 후계자로 각인되기까지 했다.

 

말레이시아가 외환위기에 닥칠 무렵인 1997년 마하티르 모하메드 당시 총리(오른쪽)과 안와르 이브라힘 당시 부총리의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아시아를 덮친 1997년 외환위기는 그의 인생을 바꾸고 말았다. 독자적인 생존을 강조하던 마하티르와 달리 서방과 협력을 주장하며 이견을 드러내 후계 구도에서 밀리고, 급기야 1999년 남색 혐의 등으로 감옥신세를 져야 했다.

 

앞서 1998년 9월 권좌에서 축출된 안와르는 ‘반(反) 마하티르’ 시위를 이끌었다. 이웃 인도네시아에서 ‘반(反) 수하르토’ 시위를 배경으로 불꽃처럼 타올랐던 레포르마시(개혁) 운동의 주춧돌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부총리 안와르의 레포르마시 시대의 선도자 역할은 말레이시아 민주주의 활동가들에게 영감을 미쳤으며, 젊은 세대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안와르의 영향력에 부담을 느꼈던지 집권세력은 그를 남색과 부패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남색은 무슬림 사회에서 결코 인정받지 못할 행위이지만, 좀처럼 입증하기도 어려운 혐의다. 안와르는 애초 부패혐의로 6년형을 선고받았다가 이후 남색 혐의가 추가돼 9년 징역형을 받았다.

 

시민단체와 국제사회를 중심으로 안와르에 대한 법적 조치는 마하티르 등 집권세력의 정치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됐지만, 그는 실형을 피할 수 없었다. 젊은 안와르가 마하티르에 정치 행로에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게 당시 말레이시아 정가의 정설이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마하티르가 퇴임한 지 1년 뒤인 2004년 대법원은 그에게 씌워진 남색혐의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하고 방면했다.

 

마하티르 모하메드 말레이시아 총리(오른쪽 두번째)와 안와르 이브라힘 의원(왼쪽 세번째)이 2021년 8월 2일 당시 집권세력의 의회 해산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레포르마시(개혁)의 상징, 남색혐의 벗어던지다

 

집권세력의 2인자였다가 레포르마시 시대를 열었던 안와르는 석방된 뒤 국민적 영웅으로 부각됐다. 그는 2008년 13대 총선에서 기득권 민족집단의 연합체인 연립여당 BN(국민전선)의 간담을 서늘케 하며 야당의 입지를 강화했다.

 

또다시 위기감을 느낀 집권세력과 사법당국은 그해 다시 안와르에게 다시 남색 혐의를 씌웠다. 여권의 공작에도 불구하고 안와르는 2012년 증거불충분 등의 이유로 혐의에서 벗어났다. 혐의에서 벗어난 그는 이듬해 치러진 선거 유세에서 집권여당을 맹폭했다.

 

집권세력은 이번에도 가만히 있지 않았지만 주체는 달랐다. 오래전에 퇴임했던 마하티르가 압둘라 바다위에 이어 선택했던 나집 라작 총리가 안와르 축출에 적극 나섰다. 지금은 오히려 부패혐의로 감옥신세를 지고 있는 인물이지만, 당시 반(反) 안와르 시각이 강했던 나집 총리의 집권세력과 사법당국은 그에게 제2의 남색혐의를 씌웠다. 잘 짜인 각본 같은 안팎의 상황에 따라 안와르는 2014년 다시 투옥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마무리되면 역사는 정의의 편도 아니고, 온전히 기록되기 힘들다. 다행이라고 할까. 나집 당시 총리의 부패 정치와 고집, 안와르의 투옥은 또 다른 역사를 만들 토대로 작용했다. 후진의 정치현장을 지켜보며 나집에 대한 기대를 접어버린 마하티르가 ‘구국의 심정’을 다졌는지 정치권 재진입을 예고하게 된 것이다. 이후의 상황은 ‘취임 2개월 안와르 말레이시아 총리(2)’에서 다뤄진다.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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