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기적’이 기록으로 남느냐, 팬들의 기억에 잠시 남을지는 너희들이 얼마나 대범하게 하느냐에 달렸다.”
흥국생명과 도로공사의 2022~2023 V리그 여자부 챔피언결정전(5전 3승제) 5차전이 열린 6일 인천 삼산월드체육관. 지난달 29일, 31일 인천 원정에서 2연패 후 2일, 4일 김천 홈에서 극적인 2연승으로 기사회생한 도로공사 김종민 감독이 전날 선수단 미팅에서 남긴 말이다. 김 감독은 ‘기록’과 ‘기억’의 차이를 부각해 선수들의 승부욕을 고취시켰다.
출범한 지 19년 된 V리그의 챔프전에서 남녀부를 통틀어 1, 2차전을 내준 팀이 승부를 최종전까지 끌고 간 것 자체가 올 시즌 도로공사가 처음이다. 여자부에서 1 2차전을 한 팀이 이긴 사례가 다섯 번이었는데, 그 다섯 팀은 모조리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도로공사로선 다양한 0% 확률을 어깨에 짊어지고 싸워야 했던 셈이다.
승부를 5차전까지 끌고 온 것만으로도 기적을 써낸 도로공사가 흥국생명을 풀세트 접전 끝에 3-2(23-25 25-23 25-23 23-25 15-13)로 꺾고 기어코 사상 최초의 ‘리버스 스윕’ 우승이라는 대위업을 달성했다. 확률 0%를 뚫고 이뤄낸, 역사에 기록될 또 하나의 기적이다.
지난 2017~2018시즌 V리그에서 정규리그 1위와 챔프전을 독식하는 통합 우승을 써냈던 도로공사는 올 시즌엔 3위로 봄 배구에 올랐지만, ‘언더독의 반란이란 이런 것’을 보여주며 2007~2008 GS칼텍스, 2008~2009 흥국생명에 이어 사상 세 번째로 정규리그 3위로 챔프전 우승을 차지한 팀으로 기록됐다. 정규리그 승점만 보면 흥국생명은 82(27승9패), 도로공사는 60(20승16패). 무려 22점을 극복해낸 우승이다. 2018~2019시즌의 챔프전 패배를 안겼던 흥국생명에게 4년 만에 그 아픔을 앙갚음했기에 더욱 감격스러운 우승이었다.
지난달 23일 현대건설과의 플레이오프 1차전을 시작으로 이날 챔프전 5차전까지 2주간의 짧은 기간 동안 7경기를 소화하고 있는 도로공사 선수들의 몸은 무거웠다. 그러나 우승을 향한 열망에 초인적인 힘이 발휘되며 체력 저하를 극복해냈다. 특히 19-23으로 뒤지던 3세트를 연속 상대 범실 3개를 묶어 연속 6점을 몰아치며 25-23으로 뒤집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올 시즌 도로공사의 우승은 김 감독의 과감한 결단도 한몫했다. 올 시즌 시작을 함께한 외국인 선수 카타리나는 18경기에서 350득점, 공격성공률 35.92%를 기록했지만, 파괴력이 떨어졌다. 특히 백어택 공격이 사실상 전무해 전술적인 활용도가 떨어졌다. 카타리나와 함께한 도로공사의 성적은 9승9패였다.
도로공사 프런트도 김 감독의 결단에 발을 맞췄다. 20215~2016시즌 GS칼텍스, 지난 시즌 흥국생명에서 뛴 ‘경력직’ 캣벨 영입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고, 캣벨은 4라운드 첫 경기인 지난 1월6일 KGC인삼공사전부터 뛸 수 있었다. 캣벨과의 동행 결과는 11승7패. 덕분에 도로공사는 4위 KGC인삼공사의 막판 추격을 뿌리치고 준플레이오프 없이 곧바로 플레이오프로 직행할 수 있었다. 최고 외인으로 군림하던 야스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 2월에야 뒤늦게 대체 외인 몬타뇨를 영입했지만, 정규리그 1위도 놓치고 플레이오프를 2전 2패로 끝낸 현대건설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캣벨의 활약은 봄 배구에서도 계속됐다. 챔프전 5차전에서 팀 내 최다인 32점을 몰아친 것을 비롯해 5경기에서 112점을 몰아치는 해결사 능력을 앞세워 기자단 투표 결과 31표 중 17표를 받아 챔프전 MVP에 선정됐다.
지난 2017~2018시즌을 앞두고 자유계약선수(FA)로 도로공사에 합류해 팀의 V리그 첫 통합 우승을 선물했던 ‘클러치박’ 박정아(30)도 이번 챔프전에서도 큰 경기에 강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도로공사의 두 번째 우승도 함께했다. IBK기업은행 시절 챔프전 우승 3회를 합치면 총 다섯 번째 챔프전 우승으로 황연주(현대건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최다 기록이다.
도로공사에서 챔프전 우승 2회를 일궈낸 김 감독은 “시즌 초반부터 지켜봐 왔던 캣벨을 중간에 빠르게 데려온 것이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면서 “시즌 전부터 우승 후보로 꼽히지도 않았고, 챔프전에서도 3위 팀이라 마음 편하게 했다. 부담 없이 한 게 이런 결과로 나온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캣벨은 “한국에 와서 이 순간만을 위해 달려왔다. 너무 행복하다”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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