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도 못 가누며 잡은 운전대…무고한 어린 생명 앗아가
지난 8일 오후 2시쯤, 대전 중구 태평동 한 식당에서 나온 A(66)씨는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며 걸어가 자신의 승용차에 올라탔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A씨는 자택이 있는 서구 둔산동까지 5.3㎞가량을 운전했다. 술에 취해 불안한 주행을 이어가던 그는 둔산동 탄방중학교 인근에서 급하게 좌회전을 하다 도로 연석을 들이받고 중앙선을 넘어 맞은편 인도로 돌진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밝힌 A씨의 운전속도는 좌회전 당시 시속 36㎞ 이상, 인도 돌진 당시 42㎞ 이상이었다. 모두 스쿨존 내 법정 제한 속도(30㎞) 초과였다.
차량은 인도를 걷던 배승아(9)양을 덮쳤다. 배양은 사고 나기 15분 전에 ‘친구들이랑 조금만 더 놀다 들어가겠다”며 엄마와 통화했다. 그게 마지막 통화가 됐다. 사고로 배양은 크게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치료 도중 숨졌다. 사고 당시 현장에 있던 9∼12세 어린이 3명도 다쳤다. 경찰은 현장에서 사고를 목격한 시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해 A씨를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당시 그의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취소 수준이었다.
9일 대전의 한 장례식장에는 배양의 빈소가 차려졌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배양의 어머니 B(50)씨는 “아직 아기인데 얼마나 아팠을까. 우리 아기 불쌍해서 어떻게 보내”라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그는 “횡단보도 건널 때는 꼭 초록불인지 확인하고, 손들고 주위를 잘 살피고 건너라고 수도 없이 가르쳤다”라며 “차가 인도로 돌진해 딸아이를 앗아갈지 어떻게 알았겠느냐”고 말을 잇지 못했다.
나이 터울이 크게 나는 동생을 딸처럼 보살폈다는 배양의 오빠 C(25)씨는 “민식이법 이후에도 스쿨존 사망사고는 계속돼 왔고, 결국 동생이 희생됐다”며 “부디 제대로 된 처벌로 더는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음주운전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다. 배양의 유족들이 지난 13일 밤늦게 대전지역 온라인 커뮤니티에 “가해자가 엄중한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진정서 작성에 동참해 달라”고 요청하자 하루 만에 모인 진정서는 1500건이 넘었다.
◆대낮 2시간 불시 음주단속에 55명 적발
경찰은 대전 스쿨존 음주운전 사망사고 등 최근 대낮 음주운전이 급증한 데 따른 긴급 조치로 지난 14일 오후 1시부터 2시간 동안 전국 431곳에서 음주운전 단속에 나섰다. 이날도 며칠 전 대전에서 일어난 음주운전 사망사고에도 불구하고 55명이 적발됐다. 면허 정지(혈중알코올농도 0.03%이상) 36명, 면허 취소(0.08% 이상) 13명이었다. 6명은 음주측정을 거부했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이날 오후 서울 서대문구 고은초등학교 앞에서 진행된 음주단속 현장에 나와 “얼마 전 대전의 한 초교 어린이보호구역에서 대낮 음주운전으로 어린이가 희생되는 정말 참담하고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며 “음주운전은 잠재적 살인이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경찰은 우리 사회 음주운전이 근절되는 그날까지, 야간은 물론 주간에도 불시에 집중 음주단속을 시행하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단속 강화만으로는 음주운전을 막기 어렵다.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내든, 내지 않든’ 단호한 처벌과 제재가 뒤따라야 한다. 이 같은 지적은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언급되지만, 현실은 솜방망이 처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1∼12월 스쿨존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중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경우는 69건 중 1건에 불과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차제에 단순 형사처벌뿐만 아니라 가해자가 평생 고통을 안고 살아는 피해자와 가족들에 대해서 보상 등 민사적 책임을 지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적한다. 또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위험 지역을 미리 점검해 시설물 등 교통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음주운전=살인…“시동잠금장치 도입해야”
음주운전은 ‘하는 사람이 또 하는 경우’가 적잖다. 경찰청에 따르면 음주운전 재범률은 2019년 43.7%, 2020년 45.4%, 2021년 44.8%다. 10명 중 4명이 처벌 후에도 다시 술 먹고 운전대를 잡는 셈이다. 음주운전 2회 이상 적발자는 2021년 기준 2만7355명에 이른다. 무려 7회 이상 적발자도 977명이나 된다.
이 때문에 애초에 술을 마시면 운전을 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 ‘사전예방’을 해야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교통 선진국처럼 술을 마신 경우 원천적으로 운전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시동잠금장치를 도입하는 방안 등이 대표적이다.
시동잠금장치는 운전자가 출발 전 혈중 알코올 농도를 측정해 음주 유무를 확인한 뒤에 차에 시동이 걸리는 시스템을 말한다. 이 장치는 미국에서 1986년 처음 도입된 뒤 캐나다, 호주, 스웨덴, 영국 등에서 쓰이고 있다. 미국 애리조나주에서는 시동잠금장치 설치를 의무화한 후 7년 사이 음주운전 사망자가 절반가량 줄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자동차업계에 따르면 시동잠금장치 기술은 이미 국내 기업이 개발해 보유 중이다. 하지만 음주운전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이 같은 기술이 개발되고도 법적인 한계로 적용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2009년 국회에 관련 법안이 제출됐지만 논의가 진전되지 못하고 헛바퀴만 돌고 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2021년 진행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음주운전 재범자에 대해 시동잠금장치를 도입할 것을 경찰청에 권고한 바 있다. 하지만 경찰청은 지난해 시범사업을 벌였지만 관련 법률이 마련되지 않은 데다 시동잠금장치 설치 예산 등의 문제에 대해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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