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혐의액 당초 125억원서 3배 380억원대 추산
정부 조치에도 경매 계속 내 집에서 쫒겨나 피눈물
120억원대 전세보증금을 가로챈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른바 ‘인천 건축왕’의 범행은 철저히 짜여진 계획대로 이뤄졌다고 전해진다. 20일 인천경찰청 등에 따르면 종합건설업체를 운영하던 그의 임대사업은 2009년부터 시작됐다. 전세보증금과 주택담보 대출금을 모아서 또 신축하는 식으로 그가 늘린 아파트·빌라·오피스텔은 인천과 경기 일대에 2700채에 달했다. 대부분을 직접 지었다.
하지만 실제 계약의 전면에는 나서지 않았다. 바지 임대인을 명의자로 내세웠고 이들의 뒤에 숨어 실체를 감췄다. 최근까지 극단적 선택을 한 이들도 건축왕이 미추홀구 일대에 지은 주택에서 살았지만 정작 전셋집 계약은 다른 이들과 맺었다. 전세를 놓은 보증금은 고스란히 그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 과정에서 주택이 또 준공됐고 이를 담보로 은행에서 담보대출을 받는 악행이 이어졌다.
범행에는 가족까지 조직적으로 동원됐다. 일당이 세입자들로부터 전세보증금을 가로채는 데 건축업자의 30대 딸이 공범으로 최근 불구속 입건됐다. 아버지에게 명의를 빌려줘 바지 임대인 역할을 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실제로 미추홀구에 있는 오피스텔형 아파트를 자신의 명의로 보유하기도 했다. 경찰은 사기뿐만 아니라 공인중개사법 위반과 부동산 실권리자 명의 등기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도 함께 적용했다.
이번 전세사기 사건으로 이미 기소된 10명 이외 나머지 공범 51명도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건축왕과 함께 사기 등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공인중개사는 6명이다. 모두 9명의 중개인이 범행에 얽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건축왕의 보유 주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데에 가담한 공인중개사나 중개보조원이 역할했다. 이들이 앞서 미추홀구 일대에 부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명의를 빌려줬다.
전세계약금의 0.3∼0.5% 수준을 부동산 중개수수료로 챙기는 것 외에도 별도 인센티브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더해 소정의 월급과 세입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모아 성과급까지 챙겼다. 수사를 확대 중인 경찰은 일당 61명의 전세사기 혐의 액수를 총 380억원대로 추산하고 있다. 당초 밝혀진 125억원에서 범죄 기간을 늘려 잡으면서 대폭 늘었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이 역시 관련된 고소 사건이 남아 최종 금액은 더 늘어날 수 있다.
소중한 생명들의 극단적 선택이 잇따르면서 최우선 대책으로 피해자들의 강제 퇴거를 막기 위해 정부가 나섰지만 여전히 경매 일정은 계속되고 있다. 미추홀구 내 관련 부동산 경매와 관련해 20일부터 은행·상호금융권의 유예가 발표됐지만 이런 대책과 현장 상황은 별개인 모양새다. 이날 오전 10시20분 인천지방법원 2층 경매법정에 주안동 모 오피스텔 3세대와 인근 오피스텔 1세대가 매물로 나왔다.
정부의 경매 유예 조치가 본격 시행됐지만, 이들 주택에는 즉각적으로 반영되지 못했다. 채권자가 공공기관이 아닌 민간 금융사나 채권관리회사(NPL)인 탓으로 추정된다. 피해 주택 상당수 채권은 현재 민간의 금융권이 보유하고 있다. 당장에 경매 중지를 강제하는 데 어려움이 큰 이유다. 시중 은행들의 협조가 필수 조건이다.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관리주택은 200여 세대에 불과한 것으로 분석된다.
앞서 금융위원회 등은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 주택 2479세대 채권을 보유한 금융기관들에 협조 공문을 보냈다. 인천시에 따르면 이 중 1523세대가 임의(담보권 실행)경매로 넘어가 87호가 매각됐다. 대통령의 경매 중단 지시가 있은 바로 다음날인 19일에도 안타까운 세입자를 외면한 경매법정이 열렸다. 당시 법원 앞에서 대책 마련을 호소하고 있던 40대 여성의 미추홀구 전셋집이 낙찰됐다. 금융기관이 채권 회수에 나서고 낙찰자가 등기 이전을 마치면 언제라도 집을 비워줘야 할 처지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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