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가 전쟁 초기부터 서방에 요청했던 미국산 F-16 전투기 지원 가능성이 열렸다.
바이든 미 행정부 고위 당국자는 20일 전화 브리핑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일본에서 만난) G7 정상들에게 ‘우크라이나 조종사들이 F-16을 포함한 4세대 전투기 훈련을 받는 공동 노력을 미국이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도 21일 G7 정상회의 직후 기자회견에서 “F-16을 러시아 영토에 투입하지 않겠다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약속을 받았다”고 전했다.
미국은 전쟁 초부터 확전 가능성을 의식해 전투기 지원에 소극적이었지만, M-1 전차 제공 당시처럼 영국, 네덜란드 등 유럽 동맹국 압박에 태도를 바꾸는 모양새다. 이에 따라 수개월 후에는 우크라이나에 F-16이 활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전망이다.
◆왜 하필 F-16일까
서방측이 우크라이나가 개전 초부터 줄기차게 요구한 전투기 공급에 F-16으로 화답한 이유는 ‘대안 부재’ 때문이다.
유럽에는 JAS-39 그리펜(스웨덴 사브), 타이푼(유럽 에어버스), 라팔(프랑스 닷소) 등 유럽 내에서 제작된 4세대 전투기들이 있다.
하지만 유럽 내 재고가 충분치 않고, 생산라인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신규 주문 증가에 직면해 있다.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서유럽 국가들은 라팔과 타이푼을 추가 배치하는 방안을 추진중이다.
독일 등에서 사용하는 토네이도 전폭기는 지상 폭격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퇴역을 눈앞에 둔 상황이다. 항공작전을 수행하려면 일정 규모 이상의 충분한 물량을 제공해야 하는데, 유럽 기종들은 이를 충족하기가 쉽지 않다.
F-16은 다르다. 우크라이나에 인도될 것으로 예상되는 기체는 네덜란드, 벨기에, 덴마크가 1970~1980년대 대량 도입한 초기형인 F-16A/B다. 이들 국가는 F-35A 스텔스 전투기로 F-16A/B를 대체할 예정이다.
F-35A 도입과 맞물려 일선에서 물러나는 F-16A/B 중에는 첫 도입 직후 성능개량을 거쳐 AIM-120 중거리 공대공미사일과 하푼 대함미사일, 합동정밀직격탄(JDAM) 등 정밀유도무기 운용능력을 갖춘 기체가 상당수다.
이들 기체는 오랜 기간 서유럽에서 운용된 만큼 유럽 내 정비 인프라와 부품·항공무장 재고가 충분히 갖춰져 있다.
서방 전투기를 사용해본 적이 없는 우크라이나에 필수인 전투기 운용경험을 얻는 것도 다른 기종보다 쉽다.
영국은 F-16 운용국은 아니지만, 호크 고등훈련기를 통한 전투기 조종사 양성 체계는 잘 갖춰져 있다. 네덜란드, 벨기에, 노르웨이, 덴마크는 F-16을 실제로 사용하는데 필요한 정비 등의 경험을 전해줄 수 있다.
우크라이나와 인접한 폴란드는 러시아산 전투기를 사용하다가 F-16으로 전환한 국가로서 우크라이나의 F-16 도입 및 운용 과정에서 노하우를 전수할 수도 있다.
F-16의 성능도 중요한 이유다. 나토 사령관이자 F-16 훈련을 담당했던 필립 브리드러브는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F-16의 조종 방법이 러시아 미그-29와는 확연히 다르지만, 익숙해지면 더 쉽게 조종할 수 있다”고 말했다.
브리드러브는 “F-16은 조종사가 조종간에서 손을 떼지 않고도 중요한 기능을 다룰 수 있는 호타스(Hands-On Throttle And Stick·HOTAS) 기술을 도입, 조종사는 전투 도중에 눈을 뗄 필요가 없다”며 “(미그-29보다) 훨씬 더 직관적이고 쉽게 조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쟁에 미칠 영향은
우크라이나에 제공될 것으로 예상되는 F-16A/B는 제작된 지 오래된 기체다. 수호이-30, 34, 35를 비롯한 러시아산 첨단 전투기와 정면으로 맞서기는 쉽지 않다. F-16A/B가 우크라이나 전쟁의 ‘게임체인저’가 되기는 어려운 이유다.
그렇다고 F-16A/B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공군은 러시아보다 뒤떨어진 전투기를 갖고도 러시아가 제공권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저지해왔다.
이같은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공군이 운용중인 러시아산 전투기보다 탐지·공격 등의 능력이 우수한 F-16의 등장은 우크라이나의 군사작전에 많은 옵션을 제공한다.
서유럽 국가들이 사용했던 F-16A/B를 인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안보 태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공군력을 단기간 내 끌어올릴 수 있다.
루마니아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루마니아는 2016~2020년 포르투갈에서 중고 F-16A/B 17대를 인수했고, 지난해에는 노르웨이에서 32대를 도입하기로 했다. F-16A/B를 도입해 운용하는 과정에서 나토의 지원을 받았다. 이를 통해 러시아산 미그-21을 퇴역시킬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도 이와 유사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AGM-88 대레이더 미사일, JDAM, 스톰 섀도우 등 서방측이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첨단 항공무장은 우크라이나 공군 미그-29와 수호이-24, 27에서는 별도의 통합작업이 필요하지만, F-16에서는 쉽게 쓸 수 있다.
유럽 내 러시아산 무기 재고가 바닥을 드러내면서 우크라이나 공군의 작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F-16의 지원은 서방의 항공무장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효과가 있다. 이를 통해 우크라이나 전력을 단기간 내 끌어올릴 수 있다.
루마니아처럼 서방의 운용경험을 전수받으면, 실전투입 시점은 더욱 빨라질 가능성도 있다.
러시아의 항공 공격을 보다 효과적으로 저지하는 것도 가능하다. 러시아는 최근 사거리 48∼72㎞의 활공폭탄을 전폭기에 탑재해 최전선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투하, 우크라이나군 방공망 밖에서 주요 지역을 공습하고 있다.
패트리엇(PAC-3)이나 나삼스(NASAMS) 등 서방이 제공한 지상 방공무기는 교전 범위가 좁고, 대도시 방어에 집중되어 있다.
최대 사거리가 120㎞인 AIM-120 중거리 공대공미사일을 사용하는 F-16A/B는 러시아 공군이 전선에서 떨어진 곳에서 활공폭탄을 투하하는 공격을 무력화하거나 견제할 능력을 갖고 있다.
러시아군의 전파방해와 위장술 등으로 위력이 떨어지고 있는 하이마스(HIMARS·고기동다연장로켓)를 대신해 러시아 지상군을 공습할 수도 있다. 최근 러시아군은 하이마스 공격을 의식, 군수물자를 분산시키고 전파방해를 실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부족해진 우크라이나 공군의 전투기 재고를 채우고, 유럽 내 F-16 운영유지 인프라의 도움을 받아 전투기 가동률을 높이는 것도 가능하다.
우크라이나가 전쟁 전에 운용했던 미그-29와 수호이-27은 1년 넘게 이어진 전쟁을 겪으면서 파괴되거나 사용 불가능한 기체가 늘어나고 있다.
폴란드와 슬로바키아가 미그-29를, 북마케도니아가 수호이-25 공격기를 제공했으나 수량이 부족했다. 러시아와 유럽 국가간 교역과 왕래가 단절되면서 러시아산 전투기 부품 공급도 쉽지 않은 상태다.
러시아산 전투기 대신 F-16A/B을 사용하면 유럽 내 정비 인력과 부품, 장비를 지속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다. 실제 지원 규모가 다소 부족해도 유럽의 F-16 인프라를 활용해 가동률을 높일 수 있다면, 우크라이나에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F-16이 우크라이나에 실제로 제공되기까지는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지만, 충분한 수량이 제때 인도된다면 우크라이나군으로서는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F-16의 지원은 가뭄의 단비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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