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안의 세상에 갇히고 말아
나는 INFP지만 때론 활발하고
궁합 최악인 ISTJ와도 잘 지내
“그 사주카페 용하대. 가보자.” 누군가 이런 제안을 해 올 때마다, 말해왔다. “소용없어.”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진실이다. 내게 ‘출생의 비밀’이 있어서다. 알고 보니 나를 키워준 부모가 친부모가 아니라거나, 병원 실수로 부모님이 바뀌었다 유의 드라마틱한 사연은 아니다. 스무 살 무렵이었다. 서랍장에 유물처럼 잠들어 있던 나의 ‘아기 수첩’을 발견하고는, 두 눈을 의심했다. 내가 믿고 살아온 생일과 다르잖아! 병원에서 기록한 내 출생일과 주민등록증에 기록된 출생일엔 10일의 차이가 있었다. 엄마에게 물어봐도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놀란 눈으로 도리어 되물으시니, 이것은 내 인생에 찾아온 미스터리.
열흘 차이로 별자리도 ‘양자리’와 ‘황소자리’로 갈렸는데, 이후 나는 사주팔자는 물론이거니와 별자리 운세와도 담쌓은 사람이 됐다. 간혹 생각하긴 한다. 내가 걸어갈 길을 미리 특정해주는 사주를 알았다면, 다가오는 어떤 시간에 대비했을까. 좋아하는 사람의 사주를 들고 용한 점집을 드나들며 궁합을 보는 운명론자가 됐을까. 확실한 건 출생의 비밀로 인해 나는 내 운명을 타인에게 물어보며 좌지우지되기보다는, 나의 선택과 의지에 집중하는 사람이 됐다는 점이다.
그러나 세상엔 사주나 별자리가 아니어도 나를 어떤 범주에 넣고 설명해 주는 것들이 많다. 대표적인 게 ‘혈액형’이다. 살면서 내 혈액형을 단번에 맞힌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AB형이라고 뒤늦게 밝히면 열에 아홉은 그런다.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 “그걸로 말하려고 했는데!” 뭐지? 내 캐릭터가 혈액형에 끼워 맞춰지는 듯한 기분은. 나는 그대로인데, 혈액형 하나로 상대 머리에서 나의 퍼스낼리티가 자동 수정된다.
혈액형이 떠나자, MBTI가 왔다. 맞다. 사람의 성격을 16가지 유형으로 나눈 그 검사. 신뢰도에 대한 갑론을박은 있지만, MBTI는 가장 ‘핫’한 스몰 토크 주제다. 그런데 간혹 ‘저 사람이 나의 귀인이 될 상인가’를 판단하는 요소로 MBTI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MBTI 궁합’을 맹신하는 이도 본다. 언제부터인가는 ‘마케팅 도구’로 상업화되더니, 입사 채용에도 등장하며 새로운 벽을 세우기 시작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일부 기업이 구인 공고에서 ‘지원 불가’라고 낙인찍었다는 그 INFP다.
최근 장도연이 진행하는 유튜브 콘텐츠 ‘살롱드립’에 출연한 배우 공유는 “MBTI 유형이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사람들이 MBTI를 알고 나면 너무 규정을 짓더라고요. 단정 짓고 프레임을 씌워버리는 게 좀 싫어서, 저는 절대로 말 안 하기로 다짐했어요.” 재밌자고 던진 MBTI 질문에 정색하며 그런 거 왜 하냐고 벌컥 하는 사람은 별로지만, 이렇게 자신만의 생각을 차분히 말하니 설득이 된다.
나는 MBTI 검사 자체가 나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때론 긍정적이란 생각도 한다. 타인을 쉽게 판단하는 편견으로 악용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타인에게 더 깊이 다가가는 다리가 돼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인 중에 MBTI 신봉자가 있는데 그런 그녀에게 나는 자주 ‘내가 이해받고 있구나’ 감동을 받곤 한다.
픽사가 최근 내놓은 ‘엘리멘탈’은 물, 불, 공기, 흙 등 4원소가 모여 사는 도시를 시각화한 작품이다. 이 중 영화가 주목한 건 ‘상극’이라 여겨지는 물과 불의 러브스토리다. 한국계 감독 피터 손이 그린 이 영화는 명백히 이민자 사회에 대한 은유지만, 원소들을 혈액형이나 MBTI 혹은 서로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면 조금 더 흥미로워진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너무나 다르기에 닿으면 소멸해 버릴까 망설이던 물과 불이 어우러지면서 찬란한 화학적 결합(케미스트리)을 이뤄낼 때다. 그리고 타인이 규정한 시선에 갇혀 있던 주인공 앰버(물)가 “왜 남들이 정한 대로 살려고 해?”라는 질문을 뛰어넘어 자기 안의 진짜 욕망과 마주할 때다. 사람은 자신을 규정하는 순간, 자기 안의 세상에 갇힌다.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INFP도 때로 활발하고 이성적일 때가 있다. 그리고 궁합 최악이라는 ISTJ와도 잘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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