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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덕의우리건축톺아보기] 전통 재료와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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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6-27 00:46:07 수정 : 2023-06-27 00:4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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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중건 당시 목공 등 세분화
옛 건축물 완벽한 복원·수리 어려워
재료 조달·공법 시대적 여건 인정
진정으로 지켜야 될 것 고민해야

2008년 숭례문이 불탔다. 세월이 흘러 올해가 2023년이니 벌써 15년 전 일이다. 서울 시내 중심가에 있는 대표적인 문화재가 많은 사람이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지켜 보는 가운데 불타고 말았으니 국민적인 충격이 컸다. 이에 정부는 국민적 상실감을 만회한다는 명분으로 전통의 재료와 기법으로 숭례문을 제대로 복구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연할 것 같은 이 말을 굳이 왜 강조했을까?

숭례문 복구 전까지 가장 대표적인 문화재 건축 현장은 1991년부터 2008년 당시까지 진행되고 있었던 경복궁 복원이었다. 경복궁 복원에서 당시 문화재청은 전통 기법과 재료를 상당 부분 포기하고 있었다. 목수와 석수 같은 장인들은 대부분 손연장 대신 목공기계와 석공기계를 주로 사용했다. 기와는 전통 기와 대신 공장 기와를, 단청은 전통 물감 대신 페인트를 사용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이어진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밑바탕이 된 표준화와 능률 우선주의의 패러다임이 문화재에도 적용된 결과였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건축물을 짓는 과정은 재료의 조달, 가공,조립으로 크게 단계를 구분할 수 있다. 조선시대 경복궁 중건 당시 목재는 물길이 닿는 한강 수계 가까운 곳이나 바닷가에서 벌채해서 한강 포구로 운송했다. 요즘 같은 도로가 없었기에 육로로 목재를 운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무리 좋은 목재가 있어도 물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면 소용없었다. 포구에 목재가 도착하면 일단 그 자리에서 자르고 다듬었다. 포구에서 경복궁 현장까지 달구지에 목재를 실어 날라야 했으므로 운반의 편의를 위해 크기를 줄였다. 목재가 도착하는 포구에는 톱질과 자귀질을 전문으로 하는 장인이 대기하고 있었다. 포구에서 초벌 가공된 부재가 현장에 도착하면 현장에서는 기둥, 보, 서까래, 추녀 등 부재별로 정확한 치수로 가공하고 모든 부재의 가공이 끝나면 필요한 위치까지 인력으로 옮겨 조립했다.

지금 이를 반복할 수 있을까? 우선 옛날 같은 벌채와 운반이 불가능하다. 지금은 산에 큰 나무도 귀하지만 산에서 나무를 함부로 벌채할 수도 없다. 물길을 이용해 목재를 옮기는 것도 불가능하다. 한강 수계 중간마다 수많은 보와 댐이 이동을 가로막고 있다. 그러면 목재의 벌채와 운반을 전통 기법에서 제외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이것도 만만치 않다. 현재 나무를 다루는 장인은 집을 짓는 대목수와 가구나 문을 짜는 소목수로 구분할 뿐인데, 예전에는 훨씬 세밀하게 분업화되어 있었다. 1804년 창덕궁 인정전 중건 후 이듬해 발행한 ‘인정전영건도감의궤’에 의하면, 대목수는 도편수를 포함해 262명이 참여했다. 이외에도 소목장 15명, 목혜장 30명, 선장 17명, 기거장 10명, 걸거장 14명, 대인거장 24명, 소인거장 31명이 각각 독특한 기능을 가지고 목재를 가공했다.

여기서 기거장, 걸거장, 대인거장, 소인거장은 모두 톱질만 전문으로 하는 장인이다. 톱은 목재의 섬유방향으로 켜는 켤톱과 직각방향으로 자르는 자름톱으로 구분하는데 걸거장만 자름톱을 사용하고 대인거장, 소인거장, 기거장은 모두 켤톱을 사용한다. 목재를 길이 방향으로 켜기가 그만큼 어려워 이 일은 더욱 전문적으로 분업화되어 있었다. 선장은 원래는 배를 만드는 장인인데 건축공사에 동원되어 대자귀로 포구에 도착한 원목을 원형이나 방형의 재목으로 다듬는 역할을 맡았다. 소목장은 문, 창문, 각종 가구, 현판등 세밀한 작업을 맡았다. 목혜장은 원래 나막신을 만드는 장인인데 끌이나 칼을 잘 다뤄 세밀한 조각이 필요한 부재를 맡아 조각했다. 조각장 역시 목혜장처럼 건축물의 공포와 임금이 앉는 용상 등에 세밀한 조각을 새겼다. 대목장은 건축물의 뼈대를 구성하는 가구(架構)를 만들어 조립하는 역할을 했다. 이 외에도 창호를 담당한 창호장과 세살목수, 한번 켠 목재를 톱으로 더욱 작은 크기로 켜는 조리장 등이 따로 있었다.

숭례문 복구 당시, 목공사 장인은 20명 남짓 참가한 대목수뿐이었으니 19세기 초 인정전 중건 때와 비교하면 이를 전통 기법이라고 장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숭례문 복구 때 원목을 가지고 판재를 켜는 일을 목수들이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흉내 내는 것도 어려워했다. 톱으로 판재를 켜는 것은 오랜 숙련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다 단청 재료나 기법을 비롯해 공사의 종류마다 전승되지 않아 현재는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전통의 기법과 재료로 옛 건축물을 수리할 수 있다고 큰소리칠 게 아니라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를 솔직히 따져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능한 데도 포기하는 것이 있고 불가능한데도 큰소리치는 것이 있다.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폐허로 남겨진 중세 건축물을 복원하는 것이 유행했을 때, 영국 비평가 존 러스킨(1819∼1900)은 옛 건축물 복원에 대한 이러한 현실적인 어려움을 직시했다. 그는 “복원은 한 건축물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심한 전체적인 파손이다”라며 “한때 위대했고 아름다웠던 건축물을 복원한다는 것은 마치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것처럼 불가능하다”고 갈파했다. 오늘날 옛 건축물을 수리하거나 복원할 때는 예전과 같을 수 없는 시대적 여건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숭례문 화재 후 15년이 지난 지금 숭례문 곁을 지날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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