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6·25전쟁 휴전 18년만에 다시 마주한 남북은 어떻게 만났을까? 전쟁 이후 다시 교류한 적도, 접촉한 적도 없고, 그렇다고 외국처럼 수교하고 외교관계를 맺을 사이도 아니어서 ‘애매모호’한 관계였던 남과 북은 서로 ‘신임장’과 신변안전을 보증한다는 ‘각서’를 써주었다. 그 신임장과 신변보장서 원문이 6일 처음 공개됐다.
통일부가 이날 공개한 남북회담문서에 따르면, 1971년 남북 비밀접촉을 시작하면서 평양과 서울에 당국자를 파견해야 했고, 적당한 형식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판문점에서 열렸던 초기 접촉에는 신변보장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이후 서울-평양 간 왕래하면서 서로 신변 안전 보증이 필요해졌다. 이에 이후락, 김영주는 신변안전 보장을 위한 각서를 서로 교환하기로 하고, 방문자 각각이 신임장을 휴대하기로 합의했다. 남북간 접촉 ‘절차’가 처음으로 생긴 셈이다.
◆남북 2인자들이 서명한 신변보장서 눈길
이후락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으로, 박정희 대통령 최측근이다. 김영주는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을 맡고 있던 김일성 주석의 친남동생이었다.
신변보장서와 답신에는 대상자 이름과 목적 외에도 안부 성격의 말이나 바람, 용건을 쓰기도 했다.
가령 1972년 1월 7일 북한이 서울을 방문하는 김덕현에게 들려 보낸 신임장은 ‘전 세계 근로자들은 단결하라. 신임장. 성명 김덕현. 직위 책임지도원. 상기 동무를 판문점에 남북회담 사업자로 파견함. 조선로동당중앙위원회 1972년 1월 7일’이라는 문구로 쓰였다.
남측이 같은 해 보낸 신변안전보장서를 보면 ‘김영주 부장 귀하. 본인은 귀하가 파견하는 김덕현 선생을 따뜻이 맞이할 것이며 그가 자기 임무를 원만히 수행하고 돌아갈 수 있도록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고 아울러 모든 편의를 제공할 것을 약속하는 바입니다. 경의를 표하면서 72년 4월 19일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라고 써서 보냈다.
1972년 3월 28일 김영주는 ‘신변안전보장서’에 ‘나는 귀측이 파견하는 정홍진선생을 숭고한 민족애로 따뜻이 맞이할 것이며 그가 체재하는 기간 자기의 임무를 원만히 수행하고 돌아갈 수 있도록 신변안전과 모든 편의를 보장할 것을 확약합니다. 경의를 표하면서 조직지도부장 김영주. 1972년 3월 28일 평양’ 이라고 썼다.
이때 남측은 ‘김영주 부장 귀하. 그동안 수차의 연락회담에 근거하여 이번 본임이 신임하는 정홍진 동지가 귀지를 방문할 수 있게된 것을 본인은 매우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본인은 오랜기간 격폐되었던 상호간의 의사를 소통하고 조국의 평화통일이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에서 이번 정홍진 동지의 귀지 방문은 큰 의의를 지닌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본인은 이 기회에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귀하의 고견을 들려주시기 바라며 아울러 가까운 시일내에 귀하와의 직접대담의 기회가 오기를 진심으로 기대하여 마지않는 바입니다. 1972년 3월 28일 부장 이후락’이라는 서신을 보냈다.
또 함께 보내는 ‘신임장’에는 ‘김영주 부장 귀하. 정홍진. 본인은 위사람의 인격과 능력을 신임하여 귀하에게 본인의 의사를 전달하고 귀하의 의사를 본인에게 전달할 권한을 부여합니다. 1972년 3월 28일 부장 이후락’이라고 썼다.
◆2인자들이 직접 왕래할 땐 프리패스?
다만 이후락이 방북해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을 면담했을 때 별도의 신임장은 없었던 걸로 추정된다.
통일부 당국자는 “남북대화사료집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신임장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실무자 비밀접촉 시에도 회담 대표, 수행원의 신임장 발급 명의를 남측은 이후락, 북측은 김영주로 하자는 내용이 나오지만, 이후락·김영주의 신임장 발급에 대해 논의한 내용은 없다”고 설명했다.
남북회담문서 목록과 원문은 통일부 남북회담본부와 국립통일교육원, 북한자료센터 내에 마련된 남북회담문서 열람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세한 열람 절차는 남북회담본부 누리집에 안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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