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선망하는 회사에서 입사 제안이 왔는데도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계좌가 없어서요.”
한국 기업에서 한국어-이란어 통·번역사로 일하던 사마네(29)씨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다. 본인 명의의 계좌가 없기 때문이다. 처음 두 달 정도는 회사 사장의 배려로 한국인 남편 계좌로 월급을 받았다. 그러나 은행에서 이란 국적자라는 이유로 연거푸 계좌 개설이 거절당하자 어쩔 수 없이 그는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란은 핵 협상 문제와 맞물려 2018년 미국의 경제 제재를 받아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 성명서상 ‘비협조국가’에 포함됐다. 금융정보분석원(FIU)의 자금세탁방지법 관련 고시를 보면 FATF 비협조국가인 이란 국적자에 대해선 은행이 거래를 거절하거나 거래관계 수립을 위해 (은행의) 고위경영진 승인을 얻는 등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사실상 계좌 개설을 거부해도 문제가 없는 것이다.
지난 6월 사마네씨와 함께 한 시중은행을 찾았다. 사마네씨는 손가락 두 마디 두께의 서류철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십여 차례 계좌 개설을 시도했는데 그때마다 요구하는 서류들이 가지각색이었다”며 “이제는 은행을 찾을 때 그때그때 발급받아 놓은 서류들을 모아서 들고 다닌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사마네씨는 서류철에 있는 서류를 보여주지도 못한 채 은행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은행 직원은 그가 이란 국적자라는 걸 확인한 뒤 “심사해도 결국 개설이 승인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마네씨는 차라리 이렇게 심사 전에 계좌 개설이 안 된다고 말해주는 편이 낫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매번 은행이 요구하는 서류들을 내고 심사받아도 결국은 계좌 개설이 어렵다는 답이 돌아오는데, 심사 접수도 안 받으니 ‘희망고문’에 시달릴 일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은행에서 회사에 재직하고 있는 게 확인돼야 계좌를 발급해 준다고 하는데, 회사에 취업하려면 계좌가 필요한 모순이 있다”고 토로했다. 이어 “게다가 회사 재직 중에도 계좌를 못 만들었는데, 은행에서 계좌를 만들어 주지 않으려고 그냥 하는 말 같다”고 덧붙였다.
계좌는 체류 자격과도 연결돼 있었다. 한국어말하기대회에서 1등 상을 받은 소미(가명·25)씨는 2019년 한국 정부 장학생으로 유학을 왔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본인 명의의 계좌가 없어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다. 어학연수를 위한 비자(D-4)로 체류하며 소미씨는 3년간 한 대학의 어학당에서 공부했다. 그는 “대입을 위해선 본인 명의의 예금잔고증명서가 필요했다”며 “한국어능력시험(TOPIK) 자격도 충족했고 한국어도 어느 정도 자신 있어 어학당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되는데 계좌가 나올 때까지 체류하기 위해 계속 어학당에 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소미씨는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에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란에서 지원해 주는 부모님께 미안해 연락도 한동안 못했다”며 “그런데 한국에서 대학에 가려고 들인 시간과 돈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남아 있었다”고 했다. 빈손으로 모국에 돌아갈 순 없었다는 설명이다.
소미씨는 비자 만료일을 앞두고 다행히 계좌를 발급받아 비자를 연장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는 “3년간 분투한 끝에 은행 아는 직원과 학교 교수님, 아르바이트 사장님 도움으로 겨우 계좌를 만들었다”며 “평범한 이란 사람이라면 계좌를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D-4 비자로 한국에 입국한 사이드(36)씨는 얼마 전 G-1(기타) 비자를 신청했다. 이란에서 건축과 석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한국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싶었다. 그런데 사이드씨 역시 본인 명의의 계좌가 없어 대학원에 입학할 수 없었다. D-4 비자로 재작년부터 서울 한 대학에서 어학당을 다닌 사이드씨는 학기가 끝나 이제 비자 연장이 안 된다고 했다.
건축학도 사이드씨는 어떻게든 한국에서 버티기 위해 타일 시공일을 나가고 있다. 본인 명의의 계좌가 없는 데다가 이란 국적자라는 이유로 현장에서 일을 주지 않아 그는 튀르키예 사람이라고 거짓말하고 출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계좌가 없어 요금을 매달 미리 결제하는 선불 핸드폰을 사용한다.
외교부와 금융위원회는 2018년 이란 정부와 대사관의 항의를 받고 한국에서 금융거래에 어려움을 겪는 이란인을 위한 ‘핫라인(전용연락망)’을 개설했다. 그러나 핫라인을 운영하는 금융감독원과 은행연합회 모두 은행이 내규상 이란인과 거래하지 않는다고 하면 개설을 강제할 순 없어 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란인의 계좌 개설은 앞으로도 쉽지 않아 보인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미국 연방검찰이 2020년 미국에 지점이 있는 타 은행에 이란 제재와 관련해 자금세탁방지법 위반 혐의로 당시 8600만달러(약 1049억원)의 벌금을 부과한 사건 이후 다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박씨마 재한이란인네트워크 목사는 “처음 (핫라인이) 만들어진 2018년 당시 보도자료가 한 번 나왔고 그 뒤로 안내가 없는데 외국인이 핫라인의 존재를 알기 어렵다”며 “무엇보다 단지 이란인이라는 이유로 은행 창구에서 거절당하는 것은 양국 정부가 나서서 개선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밝혔다.
사마네씨는 혼인신고를 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 남편의 수입과 아르바이트 임금만으로는 가계를 꾸리기 빠듯해 식을 미루고 있다고 말하며 그는 말했다. 사마네씨는 “평생 이렇게 계좌 없이 살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계좌가 없는 건 단순한 불편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주체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란인 단체 등은 이란 독재 정부의 자금으로 운용될 가능성이 큰 동결자금은 풀면서 한국에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란인에 대한 경제 제재를 유지하는 것을 두고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이드씨는 “동결자금은 이란 정부가 국민을 탄압하는 데 쓸 것”이라며 “정작 왜 이란 정부와 관계없는 이들의 금융 거래는 제한하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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