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체율 높았던 정당이 선거에 이겨
총선 때마다 여야 만능 카드로 작용
‘닥치고 물갈이’ 자칫 국회신뢰 타격
정치 무경험 초선 이념이슈만 골몰
열린우리당 ‘108번뇌’ 재연 우려도
22대, 유권자 기득권 교체 요구 속
국민의힘 TK·PK지역 바꿀 가능성
민주당은 비명계 퇴진·불출마 압박
“정치인도 전문가… 경쟁력 다선 필요”
명확한 탈락 이유 등 알릴 필요
시대 반영할 인물 발굴 노력도
‘공천 물갈이’는 총선 승리를 위한 혁신 공식인가.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 항상 빼 드는 칼이 있다. 현역 국회의원 물갈이다. 기득권의 상징으로 비치며 ‘고인물’로 비하되는 현역 의원을 대거 교체해야 혁신의 이미지를 극대화할 수 있어서다. 이를 통해 얻은 여론의 지지가 총선 승리의 동력으로 작용한 경우가 많았다.
내년 4월 치러지는 22대 총선을 앞두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여야 모두에서 물갈이론이 스멀거리고 있다. 수도권 위기론이 팽배한 국민의힘 안팎에서는 텃밭인 영남 지역에서부터 대대적인 공천 혁신으로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김은경 혁신위원회가 선출직 평가에서 하위 10∼30%별 감산을 세분화하고 다선의원 용퇴를 촉구한 바 있다.
◆총선에서 ‘약발’ 발휘했던 물갈이
최근 총선 결과를 보면 18대부터 20대 총선까지 현역 의원 교체율이 높았던 정당이 더 많은 의석을 가져간 것으로 파악됐다.
우선 18대 총선에서는 약 38%를 바꾼 한나라당이 153석을 얻은 반면 19%를 교체한 통합민주당은 81석을 가져가는 데 그쳤다. 19대 총선도 더 많은 의원을 갈아치운 새누리당이 민주통합당보다 25석을 더 가져갔다.
반대로 20대 총선은 33% 정도를 새로운 인물로 공천한 더불어민주당이 24% 정도를 바꾸는 데 그친 새누리당을 1석 차로 누르며 제1당을 차지했다. 21대 총선은 유일하게 물갈이 비율이 낮은 당이 승리했다. 당시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라는 특수한 시기였고 높은 대통령 지지율과 초기 ‘K방역(한국형 방역)’의 성공이 주요인으로 꼽혀서 결이 다른 선거다.
현역 의원에 대한 유권자의 물갈이 요구는 현재 진행형이다. 지난 6월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내년 총선에서 거주 중인 지역구의 현 국회의원이 다시 당선되길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52.6%의 응답자가 ‘다른 사람이 당선되는 것이 좋다’고 답했다. 기존 의원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답변은 28.6%에 불과했다.(지난 6월 28∼29일 전국 성인 남녀 1003명 대상으로 실시.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물갈이가 총선 승리에 유효한 이유는 국회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때문이다. 국회의원을 특권만 누리는 기득권층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여전하다. 전예현 시사평론가는 “큰 틀에서 국민은 늘 정치가 변화하기를 원한다”며 “현재 국회의원인 사람들을 기득권 정치인이라고 보는 정서가 있으니까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을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대체하는 것만으로도 뭔가 변화가 있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효과는 일부 있다”고 설명했다.
물갈이에는 한국 정치 특유의 정치공학적 맥락도 존재한다. 당내 계파 간 역학이 물갈이의 방향과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친다. 18대 총선 당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은 친박(친박근혜)계를 대거 탈락시키면서 ‘공천학살’이라는 말이 나왔다. 19대와 20대 총선에선 반대로 친박계가 공천을 주도하며 친이(친이명박)계가 대거 고배를 마셨다. 더불어민주당도 당시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공천을 주도한 20대 총선을 제외하면 공천 과정에서 계파 갈등이 노출됐다. 이런 경우 현역 의원 교체는 인적 쇄신보다는 기득권 싸움으로 비칠 수도 있다.
◆물갈이 만능주의는 경계해야
국회 불신이 물갈이를 불러왔다면, 그 물갈이는 과연 국회에 대한 신뢰를 제고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까.
15대 총선부터 지금까지 초선 비율은 40%를 넘었다. 21대 국회에 처음 입성한 인원도 155명으로 전체의 52%에 달했다. 그러나 통계청이 발표하는 ‘한국의 사회지표’ 조사를 보면 최근 10년간 국회는 항상 신뢰도 꼴찌였다.
물갈이로 여의도에 쉽게 진입한 다수의 초선의원들이 되레 리스크로 작용하기도 한다. 여의도 문법에 익숙하지 않고 의정활동 경험이 없어서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정치적 외풍에 편승해 열린우리당에 들어온 초선의원은 당시 108명이었다. 열린우리당 의석의 71%를 차지한 초선의원들은 지나치게 이념적 이슈에만 골몰해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초선들이 각자 산발적으로 의견을 낼 뿐 하나로 모아내지 못해 ‘108 번뇌’라는 비판에도 시달렸다.
이런 이유로 ‘닥치고 물갈이’는 지양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것이다. 국회 신뢰 제고에 오히려 독이 된다는 목소리도 있다. 유능한 다선의원을 배출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정치인도 고도의 전문가 집단이라 국회에는 경쟁력 있는 정치인들이 많아야 한다”며 “그러나 지금 우리 국회를 보노라면 미래의 발목을 잡고 있는 집단이 정치인”이라고 지적했다. 조진만 덕성여대 교수(정치외교학) 역시 “한 부서에 평생 있는 관료들에 비해 의회의 전문성이 떨어진다”며 “국회 상임위원장이나 선임자 제도가 잘 갖춰지지 않은 한국에서는 다선의원이라든지 원로 정치인이 과거의 좋은 경험을 후배 의원들에게 전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22대 총선 물갈이 전망은?
다가오는 22대 총선 역시 물갈이 규모가 클 가능성이 높다. 유권자들의 피로감과 더불어 각 당의 지도체제를 공고화하기 위해서다.
국민의힘은 정부·여당의 유기적인 협력을 위한 ‘대통령의 사람들’이 필요하고, 민주당은 이재명 대표 체제 구축을 위해 현역 의원 교체가 필요하다. 조 교수는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해 윤석열 대통령은 총선에 사활을 걸어야 하고, 이 대표도 사법 리스크에 대선까지 비슷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여당은 대통령실의 부인에도 ‘용산발 검찰 인사 공천’ 가능성에 대한 관측이 계속 나오고 있고, 민주당에서도 친명(친이재명)계 원외 인사들이 비명(비이재명)계 현역 의원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양당의 물갈이는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민주당은 지난달 30일 현역 의원에 대한 ‘의정활동’평가를 마무리했다. 현역 의원 평가점수 1000점 중 의정활동은 380점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대표의 복귀도 가까워지면서 친명계의 공세도 강화될 전망이다. 정청래 최고위원을 비롯해 민주당 지도부와 친명계는 체포동의안 가결표 색출을 주장하고 있다. 친명 성향을 띠는 민주당 원외조직 ‘더민주전국혁신회의’는 체포동의안 가결 사태에 책임 있는 인사들의 퇴진과 불출마를 요구했다. 의제와전략그룹 더모아의 윤태곤 실장은 “내부 경쟁이 아주 치열한데 그때 친명, 비명이라는 외피를 덮어쓰기도 할 것”이라고 평했다.
국민의힘 내에선 대구·경북(TK), 부산·울산·경남(PK) 지역에서 물갈이 가능성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당장 출마를 준비하는 대통령실 출신 인사들의 이름이 지역에서 오르내리는 터다. 이진복 정무수석은 부산 동래, 강명구 국정기획비서관은 구미 출마설이 나오는 등 여러 인물의 등판이 거론되고 있다. 법률상 다음 총선에 입후보하려면 선거 90일 전인 내년 1월11일까지 공직에서 물러나면 된다. 전통적인 표밭 쇄신 압박도 강하다. 실제로 21대 총선에서 TK 현역 교체는 약 64%, 20대 총선 때는 대구 75%, 경북 46% 정도의 교체율을 기록했다.
◆유권자 납득하게… 공천기준·절차 투명하게 공개해야
총선을 앞두고 각 당이 단행하는 물갈이 이면에는 현역 국회의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불신이 자리해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이유에서 현역 의원 물갈이 과정이 보다 투명하게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유권자가 납득할 만한 기준을 공개하고 그에 따라 공천을 한다면 믿을 수 있는 공천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예현 정치평론가는 “당에서 현역 의원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표를 갖고 있다. 그런데 그걸 공개하지 않는다”며 “사전에 현역 의원 탈락 기준이 명확하고 일정 수준에서 공개가 돼 있는 이런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내용적으로도 시대의 변화를 반영할 수 있는 인물을 적극 공천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물갈이가 우리 정치의 다양성을 제고하는 데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은 지난 6월 대정부질문에서 사회적 약자를 물고기 ‘코이’에 비유하면서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에 큰 울림을 줬다. 김 의원 외에도 19대 당시 한나라당 이자스민 의원 등 다양성을 추구한 공천은 여러 선례가 있다.
정당은 이런 신인을 길러내기 위한 체계를 다시 정비해야 정치권에 새 바람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22대 총선 공천 전략은 가시화하지 않은 상태다. 다만 일부 전문가들은 양당이 과거에 비해 질 높은 공천을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지 못한 것 같다는 평을 내놓는다.
조진만 덕성여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양대 정당은 예전에 정치 신인들을 전략 공천한 다음에 당선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당선시켰다. 추미애, 나경원, 남경필, 원희룡 등이 그렇게 해서 온 것”이라며 “지금은 괜찮은 후보를 당선시킬 수 있는 당세라든지 그런 조직적인 힘이라든지 단합해서 뭘 할 수 있는 리더십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옛날보다는 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