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과 실패의 손을 잡고 춤을 추자”
수능을 치르는 수험생들에게 이른 새벽부터 응원과 격려 물결이 쏟아지는 수능날, 오후 7시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는 특별한 축제가 열렸다. 바로 ‘우리들의 실패, 실패자들의 연대’라는 이름을 가진 ‘실패자들’을 위한 축제. 2011년부터 입시경쟁교육, 학력·학벌 차별에 맞서는 활동을 해온 시민단체 ‘투명가방끈’에서 이 세상 실패자들을 한 공간에 불러 모았다.
◆성공과 실패를 규정짓는 사회를 향한 외침, “너, 뭐 돼?”
입시에, 졸업에, 학교 적응에 실패한 사람. 또는 나눗셈에 실패한 사람, 결혼 생활에 실패한 사람, 여성으로 인정받길 실패한 사람 등등. 사회에서 ‘실패’로 이름 붙인 다양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각자의 ‘실패담’에 귀를 기울였다.
첫 번째 발언에 나선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 서연씨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서연씨에겐 이미 함께 가정을 이루고 싶은 남자친구도,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도 있지만 아직 결혼하지 못한다. 법적 혼인 가능 나이인 만 18세에 이르지 못해서다. 하지만 내년 5월 드디어 만 18세가 되는 서연씨는 결혼을 한다.
이날 서연씨는 “어른들이 아이를 안고 있는 저희 부부를 보고 ‘애국자네!’ 하다가도 제가 몇 살인지 알게 되면 싸늘한 반응을 보낸다”며 “남들이 수능 준비할 땐 나는 유치원을 알아보겠지만 저는 제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학교와 사회는 높은 성적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물론, 수능 시험장조차 들어가지 못하는 수많은 삶을 싸잡아 실패한 삶이라고 말한다”며 “저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학교, 사회) 너 뭐 돼?”라고 외쳤다. 당당한 서연씨의 외침에 장내는 웃음꽃이 폈다.
연극인 송김경화씨는 ‘실패’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나누기도 했다. 경화씨는 2021년에 긴긴 육아 끝에 다시 연극판에 돌아와 신작을 올렸다. 110분짜리 공연이었다. 6~8세의 4명의 아동·청소년과 5명의 어른 배우들이 호연을 펼쳤다. 더 큰 민간극장에서 공연할 기회도 있었지만, 극장의 폭언에 연극을 올리지 않기로 선택했다.
이날 경화씨는 “올해 극을 3개 올리고 정말 바쁘게 지냈지만, 주변에서는 뭐하고 지내는지 물어본다”며 “OTT를 포함한 대중매체에 좋은 작품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런 시대에 연극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라고 물었다. 그러면서 ‘실타래’ 사진을 보여주며 “저에게 실패란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잇는 ‘실’처럼 서로를 이어주는 연대, 연극도 마찬가지”라고 전했다.
또 다른 발언자 틀림연대 활동가 한성씨는 개인적인 실패의 경험을 나눴다. 한성씨는 MTF 트렌스젠더다. 한성씨는 “수능날 ‘남자 시험장에 여자애가 왜 왔냐고. 화장실 가서 바지 벗겨봐야 한다’는 폭력을 당하고 수능을 망했다”며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아등바등 존재한다고 (보여주며) 나름의 살아가는 방식을 찾는다”고 말했다.
이어 “성별 이분법적인 교육제도 안에서 소외되고 밀려나고, 이젠 교과서에서도 우리가 지워진다”며 “하지만 세상에 만연한 폭력, 혐오, 억압 앞에 가능성보다 절망으로 임하는 것, 그것이 실패라고 생각한다”고 담담히 전했다.
◆“성공신화에 저항하며 실패한 다수와 함께 춤을!”
“누구나 조금씩은 틀려. 완벽한 사람은 없어. 실수투성이고 외로운 나를 봐.”
가수 이상은씨의 ‘비밀의 화원’이 카페에 울려 퍼졌다. ‘더딤밴드’의 축하 공연이었다. 더딤밴드는 “즐거움과 사람들과 함께하는 힘은 완벽함이 아니라 더 많은 더딤과 소통에서 온다고 생각한다”며 흥을 돋웠다. 이날 조현병 당사자 밴드 ‘콩나물 밴드’와 ‘모두의 훌라’ 공연도 이어졌다.
이날 현장을 찾은 70여명의 참석자들은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실패’라는 두 글자로 연결됐다. 참석자로 온 발달장애 당사자이자 동료지원가 박경인씨는 “나는 부모님도 없고, 가난하고, 학교에 가면 왕따 당해서 부족한 게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며 “23살에 무작정 지역사회에 나와서 힘든 시간이 있었지만, ‘탈시설연대’ 동료 지원가들을 만나고 재밌게 살 수 있는 걸 알게 됐다”고 전했다.
이어 “발달장애인도 자립할 수 있고, 동네에서 같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마이크를 잡았다”며 “내 생에 친구들 없을 줄 알았는데 친구들 많이 생겼고, 차별 없는 세상이 최고!”라고 덧붙였다.
매주 금요일마다 거리 청소년들 상담을 하고 있다는 더쿠(활동명)씨도 “현재 여성가족부와 ‘수능연합거리상담’ 사업을 진행하는데, 투명가방끈 활동을 알게 되고 포스터 디자인도 바꿨다”며 “수능날 수능을 치르지 않는 누군가는 배제될 수 있다는 생각에 수능 끝을 ‘순응 끝’이라는 식으로 풀어냈다”고 전했다.
축제의 마지막은 모두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훌라춤을 추며 마무리됐다. 이날 축제를 기획한 투명가방끈 활동가 난다(활동명)씨는 “한국의 공교육이 대학입시를 유일한 목표로 달려가고 있다”며 “모두가 성공할 수는 없는데 경쟁을 통해 좋은 대학을 가야만 잘 살 수 있다는 성공담에만 주목하는 건 이상하지 않나”라고 말했다. 이어 “수능날 모두 수험생을 응원하는 분위기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대학을 포기하거나 대학을 거부한 사람들 이야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고 물음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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