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해안경비선 두 척이 필리핀군 함정을 물대포로 공격하는 모습은 남중국해(South China Sea)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중국과 주변국 간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필리핀 외교부 등에 따르면 지난 5일 영유권 분쟁 지역인 남중국해의 세컨드 토머스 암초(Second Thomas Shoal·필리핀명 아융인섬) 인근 해역에서 중국 해경선 두 척이 필리핀군 보급선 우나이자 메이 4호를 향해 물대포를 쐈다. 필리핀 측은 ”보급 임무 수행 중인 함정이 중국 해경선과 충돌해 선체가 손상됐고, 선원도 다쳤다”고 밝혔다. 중국 정부는 필리핀 함정이 자국 수역에 불법 침입했다며 오히려 필리핀 정부를 비판했다.
◆필리핀, “지역분쟁 최전선”···“중국 측 주장 인정할 수 없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은 중국 해경의 물대포 사건이 발생하자 필리핀을 지역분쟁 최전선 국가로 묘사하고 중국 위협을 부각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최근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아세안·호주 정상회담에서 “1942년과 마찬가지로 필리핀은 이제 지역 평화를 저해하고 지역 안정을 약화시키며 지역 성공을 위협하는 행동에 맞서 최전선에 서 있다”고 밝혔다.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 압박이 갈수록 커지자 국제사회에 이를 환기하고, 필리핀 내부적으로도 일치된 여론을 모으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세계 제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역사적인 사실을
부각해 최근 중국 위협이 이에 비견된다는 위기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앞서 독일을 방문했던 지난 12일(현지시간)에도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 영유권 주장을 정면 반박했다. 그는 “어느 나라와 국제기구도 (중국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으며, 필리핀 입장은 더욱 명확하다”고 밝혔다고 로이터 통신이 전했다.
중국은 남중국해의 90%에 해당하는 지역을 ‘U’자 형태로 경계를 만들어 이를 중국 영해라고 주장해왔다. 중국은 그러면서 남중국해 각 지역 군도에 군사시설을 구축하고 병사들을 주둔시켜 사실상 ‘중국 내해’로 삼으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미 행정구역을 설치했으며, 방공식별구역(ADIZ)를 설정해 타국 항공기나 선박이 마음대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 해역 영유권 강화를 위한 행보를 계속해서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남중국해서 중국 견제 나선 필리핀···좌초시킨 군함에 병력 주둔시켜
세컨드 토머스 암초가 갈등으로 부각한 것은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은 1995년 남중국해 스프래틀리군도(Spratly Islands)의 암초 미스치프환초(Mischief Reef)에다가 군사시설 구축에 착수했다. 필리핀은 4년 뒤인 1999년 미스치프환초에서 37.8㎞ 떨어진 세컨드 토머스 모래톱에 시에라 마드레함을 일부러 좌초시켰다. 세컨드 토마스 암초는 필리핀 배타적 경제수역(EEZ) 내에 위치하고 있다. 시에라 마드레함은 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했던 상륙함이다. 이후 이 선박을 고정한 뒤 군사기지로 사용해왔으며 수십명의 해병대 병력을 주둔시켜 중국의 세력 확장을 견제해왔다.
중국은 2014년부터 이 지역 영유권 공세를 강화했다. 세컨드 토머스 암초를 둘러싼 중국 물대포 공격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시에라 마드레함 철거를 요구하면서 수차례 충돌이 일어났다. 2021년 11월 중국 해경 함정이 물대포를 사용해 필리핀 보급선 2척을 봉쇄해 시에라 마드레에 있던 필리핀 해병대에 보급품 전달을 가로막았다. 2023년 8월에도 중국 해경선이 보급 임무 중인 필리핀 해안경비대 선박을 향해 물대포를 발사했다.
◆발단은 중국의 남중국해 내해화 시도···중, 미군 떠나자 필리핀령 암초 점령
중국은 2012년 필리핀이 실효 지배하고 있던 스카버러 암초(Scarborough Shoal)를 강제로 점거했다. 인공섬을 조성하고 군사시설을 만들어 요새화에 나섰다. 중국에서는 이 암초를 황옌다오로 부르고, 필리핀에서는 파나타그 암초라 부른다. 1784년 이곳 인근에서 난파된 동인도 회사 무역선 스카버러 호(Scarborough)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필리핀 수빅 만에서 약 200km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석호 포함 전체 면적은 150㎢정도로 알려져 있다. 미군이 필리핀에 주둔할 당시 미군은 이 섬을 미군 사격 훈련장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필리핀 내 연이은 반미 시위로 1992년 미군이 철수하자 중국이 그 틈을 타고 이 섬을 점령했다. 결과적으로 미군이 떠난 자리에 중국이 다시 자리를 잡은 모양새가 됐다.
필리핀은 이 사안을 네덜란드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PCA)로 가져가,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이 국제법상 근거가 없다는 판결을 2016년 받았지만, 중국의 점유 상황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필리핀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 재임 당시 친중 정책을 펴면서 중국의 남중국해 점유를 인정하는 듯한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2020년 7월 연례 국정연설에서 “중국은 이미 그 부동산(남중국해)을 갖고 있다”고 밝힌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외신은 필리핀이 중국을 상대로 더 이상 남중국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을 것을 시사하는 언급이라며 발언의 의미를 분석하기도 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의 뒤를 이은 마르코스 대통령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 대해 전임 대통령보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미국과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을 체결하고 자국 내 기지에 미군 주둔을 허용하기로 했고, 미국과 공동해군 순찰 활동도 강화하고 있다. 2023년에 9월에는 스카버러 암초 주위에 중국이 설치한 ‘부유 장애물’을 철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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