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 당선인이 “저출생을 고려해 의대 정원을 500∼1000명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정부가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정책에 참고한 보고서를 작성한 연구위원은 “굉장히 잘못된 상황 인식”이라고 반박했다.
권정현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28일 본지 통화에서 임 당선인의 주장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권 연구위원은 “의료서비스를 이용하는 연령별 분포 그래프는 U자형이다. 소아(만 15세 이하 아동)에서 의료서비스 이용이 많다가, 20∼40대에는 병원을 잘 안 가고, 50대 후반부터 다시 많이 이용한다”고 설명했다. 저출생 현상으로 소아의 의료서비스 이용이 줄어도, “고령화로 인해 고령자의 의료서비스 수요가 굉장히 빠르게 증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권 연구위원은 고령화라는 요인을 차치해도 한국의 의료서비스 이용은 늘어나는 추세라고 분석했다. 의료서비스 수요는 고령화 외에도 소득과 제도의 영향을 받는다. 한국은 전반적 소득 수준과 건강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의료서비스 이용이 늘고 있고, 실손의료보험 제도가 도입되면서 의료시장이 굉장히 빠르게 커졌다는 설명이다.
권 연구위원은 “현상적으로만 봐도 의료서비스 수요가 계속 증가하고 있는 데 반해 의사 인력은 굉장히 오랜 기간 통제해왔다”면서 “의대 정원을 줄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했다.
◆“연구자는 연구만, 정책은 정부 결정”
일각에서는 정부가 2000명 증원 정책에 참고한 3개 보고서 어디에도 “2000명을 증원해야 한다”는 내용이 없다는 점을 토대로 정부 정책에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권 연구위원은 “정책을 입안하는 정부의 입장과 연구자 개인이 생각하는 정책의 방향은 당연히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권 연구위원은 “보고서에 ‘연간 2000 증원’ 이야기는 없지만, 그래서 정부가 틀렸다거나 근거 없는 주장을 하는 건 아니다”며 “보고서에는 의사 수 부족에 대한 근거가 있고, 정부는 그 근거를 바탕으로 정책을 펼쳤다”고 강조했다. ‘논문의 객관적 추계를 참고하지만, 정책은 정부가 직접 결정한다’는 보건복지부 입장과 궤를 같이하는 주장이다.
앞서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은 지난 27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브리핑에서 “(정부가 정책에 참고한) 연구 논문은 객관적 추계에 대한 자료와 연구자 주관이 들어간 정책 제언이 있는데, (과도하다는 건) 본인 주관을 담은 정책 제언”이라며 “정부가 참고한 건 재정 추계로 3개 논문 모두 2035년 1만명의 의사가 부족하다는 걸 기본 시나리오로 삼았다”고 밝힌 바 있다.
◆의사 수 ‘현상 유지’와 ‘현재도 부족’
보고서가 제안한 정책과 정부가 발표한 정책의 차이는 어디서 시작됐을까. 권 연구위원은 “정부와 연구자가 생각하는 ‘시간에 대한 개념’이 달랐다”고 표현했다.
권 연구위원이 진행한 연구는 의료서비스 수요와 의사 인력 공급에 대한 전망을 다루며 ‘현시점의 수요·공급 균형이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의사 수’를 주요 내용으로 담았다.
첫번째 차이는 여기서 시작됐다. 보고서는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의사 수’를 추계했는데, 정부는 ‘현 상태에서도 의사가 부족하다’고 보고 있다. 권 연구위원은 “의료서비스 수요·공급 추계에서 의사 인력의 최적 수준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현시점을 균형이라고 가정하고 여기서 얼마나 추가로 필요할지 따지는 게 일반적 연구 방식”이라면서 “정부는 지금도 의사 인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 ‘국민 건강 손실’ 비용 고려”
두번째 차이는 ‘증원 과정에서 무엇을 감내할지’다. 권 연구위원은 보고서에서 점진적인 증원을 주장했다. 그는 “2000명을 한번에 증원하면 당장의 갈등 소지도 있고, 빠르게 자원을 투입해 교육환경을 정비하는 데 따른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점진적인 증원이 큰 혼란 없이 연착륙하는 방안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점진적 증원 방식에도 한계는 있다. 권 연구위원은 “점진적 증원은 의사 인력을 빠르게 채우지 못하기 때문에 의사가 부족한 시기가 어느 정도 지속한다”고 했다. 또 “점진적으로 증원해도 이런(의·정 갈등) 식의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정원을 어느 정도로 하면 의사들이 파업하지 않고 문제 삼지 않을지 불확실하다”고도 했다. 다만 그는 “의사가 부족한 시기를 감내하더라도 천천히 증원해서 교육 현장의 혼란 등을 완화하는 방식으로 접근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정부는 의사를 빠르게 증원해서 현재의 의료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입장을 선택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의사 증원을 뒷받침하는 다른 정책 수단을 펼칠 수 있는 정부 입장에서는 ‘의사 인력이 부족한 시기를 감내하되 급격한 증원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줄이자’는 방식이 아니라 ‘의사 인력을 빠르게 확충하되 사회적 혼란을 줄일 수 있는 정책을 함께 추진하자’고 결정했다는 것이다. 정부는 의대생과 전공의의 교육·수련 환경을 지원하는 등 필수의료 패키지를 함께 추진하고 있다.
권 연구위원은 “어떤 방식이든 다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는 의사가 부족한 채로 필수의료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아 국민 건강이 손실되는 사회적 비용이 교육 현장의 어려움이라는 비용보다 크다고 판단한 것인데, 비용효과 측면에서 정부 입장이 맞을 수 있다”고 했다.
◆“의·정 한발씩 물러나 대화해야”
‘2000명 증원’을 두고 교착 상태에 놓인 의·정 갈등은 어떻게 해야 할까.
권 연구위원은 “정부와 의사들이 한발씩 물러나서 협의를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며 “일단 의사들은 환자 곁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행동의 도덕적 명분과 타당성이 중요한데, 의사의 본분을 떠난 행동을 타협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게 국민의 지지를 받기는 어렵다”면서 “의료현장으로 돌아와야 대화의 물꼬가 터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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