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좋게 뉴잉글랜드음악원 합격 후 동급생과 실력 차이 좁히려 연습 매달려”
“미국 명문 오케스트라 월급쟁이 단원 꿈꾸다 매력 느낀 실내악 연주자 되기로”
2020년 초 혈혈단신 한국 정착, “대중과 클래식 가깝게 연결해주는 일 하자” 다짐
TV 예능 ‘나 혼자 산다’ 출연 후 인기 급상승, “연주 기회 많아져 감사하면서도 부담 커져”
“누군가를 만나면 어차피 에너지 쓰는 데 서로 긍정적 에너지 주고 받았으면”
“한국은 고향처럼 마음 편해, 평생 살 것”
“명동성당 독주회와 가난한 학생들 위한 최고의 무료 음악학교 설립이 꿈”
“강동석(바이올리니스트·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예술감독) 선생님처럼 훌륭한 솔리스트도 아닌 내가 한국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다 대중과 클래식을 가깝게 연결하는 일이 딱 맞겠다라고 생각했어요.”
‘클래식계 아이돌’로 불리는 인기 바이올리니스트 대니 구(33·한국명 구교현)가 4년여 전 한국 정착을 결심하면서 품은 뜻이다. 미국 교포 2세인 그가 혈혈단신으로 한국에 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와 무명 연주자 시절을 견디게 한 바탕이었다. 클래식뿐 아니라 재즈·크로스오버 음악과 작사·작곡·가수, 방송 진행자 등 경계를 넘나드는 활동을 하고, 최근 MBC TV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 26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난 대니 구는 “30대인 저에게 ‘클래식 아이돌’이라고 하니 민망하지만 정말 감사하다”면서도 “앞으로는 ‘클래식 (대중화) 전도사’란 말을 듣고 싶고, 클래식계에 누가 되지 않도록 더 열심히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으로 유학 온 고학생 부부의 외동 아들로 나고 자란 대니 구는 6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켰지만 취미로 즐기는 정도였다. 그러다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을 앞두고 대학 지원 이력서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참여한 예술캠프 경험을 계기로 마음이 바뀌었다. “클래식, 재즈, 현대무용, 시, 연극 분야 재능 있는 학생을 5명씩 선발해 5주간 합숙 교육을 하면서 결과물을 만드는 캠프였는데 운 좋게 합격했어요. 예술은 보고 듣는 것도 좋지만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거에 확 꽂혔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부모님께 음악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1년 동안 바짝 연습한 후 보스턴의 명문 음대인 뉴잉글랜드음악원(NEC)에 합격한 그는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고 했다. “전공을 늦게 시작한 제가 한국에 있었다면 좋은 음대에 들어가지 못했을 겁니다. 한국 학생들 연주 실력이 대단하니까요. 그런데 미국은 잠재력을 보는 편이었고, 평가 곡도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해서 저는 쉬운 곡을 골랐습니다.”
대니 구는 ‘할아버지 교수’인 도널드 와일러스타인 교수의 지도 아래 동급생들과의 실력 차이를 좁히려 애를 썼다. 아르바이트 할 때를 빼곤 학교 연습실을 가장 먼저 들어갔다가 가장 늦게 나왔다. “‘내가 가장 열심히 연습하는 사람이다’는 자부심 하나로 어떤 실력자 앞에서도 눌리지 말자고 각오했었거든요.”
보스턴 심포니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등 미국 명문 교향악단에 들어가 편하게 월급받으며 연주하는 삶을 꿈꿨지만 대학 졸업 즈음 생각이 바뀌었다. 가끔 지역 음악 축제 등의 오케스트라 활동을 할 때마다 자신의 성격과 잘 맞지 않는다고 여긴 것. 그래서 대학원에 가서는 실내악 연주 활동에 치중했다. “학비와 생활비도 벌어야 했던 데다 실내악이 저와 잘 맞고 재미있었거든요. ‘나 좀 써달라’며 오디션도 많이 봤는데, 대학원 첫해에는 공연이 5개가량이었는데, 졸업할 때는 (다 소화를 못할 만큼) 무대가 엄청 많았어요. 그런 삶을 살다 프리랜서 실내악 전문 연주자가 되기로 한 순간, 콩쿠르 도전 생각도 접었습니다.”
대학원을 마치고 2015년 샌디에이고의 라호야 페스티벌에 초청 받은 그는 유명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46)과 처음 만나 사중주 공연한 것을 계기로 이듬해 한국 무대에 데뷔했다. 용재 오닐이 주도한 ‘앙상블 디토’의 일원이 된 것이다. 디토 활동을 잠깐 하고 난 뒤에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실내악 연주와 학생 교습을 병행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다 갑자기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란 생각이 들었어요. 연습 시간도 줄고, 애들 가르친 날은 기를 다 쏟아 느슨해지는 제가 용납이 안 됐습니다. 순간 꼭 한번 살아보고 싶었던 한국으로 가자고 결심했어요.”
한국행 이유는 두 가지였다. 먼저 디토 멤버 시절 가끔 한국에서 공연할 때 관객들이 보여준 열렬한 호응이 그리웠다. “클래식 관객들의 연령대도 다양하고, 무대에 입장할 때나 연주 끝났을 때 야구장과 축구장 응원처럼 환호해주는 걸 처음 겪어 보니 되게 신기하고 좋았습니다.”
두 번째는 정체성 때문인지 한국에 올 때마다 고향에 온 듯 마음이 편했다. “주로 시카고와 필라델피아에서 흑인이나 백인이 많은 동네에 살아서 은근히 스트레스가 있었던 것 같아요. 한국에 오니 모든 사람이 똑같이 생겨서 그런지 아주 편하더라고요.”
그렇게 2020년 2월 짐을 싸서 한국으로 왔지만 코로나19가 터져 막막했다. 바쁘게 살아야 하는 성격인데 연주할 자리가 없으니 불안했다. 급기야 월세를 낼 돈까지 떨어지자 어린이 바이올린 교습, 책방 등의 작은 음악회, 기업 대상 클래식 강연 등 가리지 않고 일하며, 어린이용 유튜브 프로그램과 JTBC ‘슈퍼밴드2’ 출연 등 다양한 도전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활동 기회도 늘어났다. 서울스프링축제(SSF)와 서울재즈페스티벌, 어린이들을 위한 클래식 프로젝트 ‘핑크퐁 클래식’ 등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2022년 4월부터 피아니스트 손열음에 이어 MBC ‘TV예술무대’ 진행을 맡고 있다. 언제나 밝은 표정과 흥이 넘치는 에너지로 분위기를 돋우며 누구를 만나든 기분 좋아지게 하는 그의 친화력이 한몫했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 자체가 에너지를 쓰는 일인데 상대방에게 당연히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요? 반대로 그런 에너지를 못 주는 사람은 굳이 만나고 싶어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가 한국에 온 지 불과 4년 만에 어떻게 ‘클래식계 마당발’로도 불리게 됐는지 짐작된다.
특히, 인기 TV 예능 ‘나 혼자 산다’ 출연 이후 주가가 더욱 높아졌다. 국내 주요 교향악단과의 협연연이나 재즈·국악 무대 등 여기저기에서 연주 요청이 빗발치고 있다. 그는 “연주할 기회가 많아져 감사하고, 매일 일이 있어 지칠 수밖에 없지만 제가 꿈꿔왔던 상황”이라며 “그만큼 부담감도 생겼다”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제가 클래식 음악 홍보대사가 된 거니까 클래식 음악가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연주도 잘 하고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연습을 게을리 하면 안 되고 더욱 열심히 하려고 해요.”
그러면서 “예전에는 항상 최고가 되고 싶었는데, 이제는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다”며 “나처럼 SSF와 재즈페스티벌에서 연주하고, 노래도 하는 사람이 없지 않냐”며 웃었다. 그는 지난 10일 발매한 디지털 싱글 앨범 ‘문 라이트(MOON LIGHT)’에서도 바이올린 연주와 노래 실력을 뽐낸다. 재즈 피아니스트 조윤성과 호흡을 맞춘 노래 ‘러브 레터(Love Letter)’와 ‘저스트 유(Just You)’는 대니 구가 작사·작곡에 참여하고 직접 불렀다.
그는 후원 받아 사용하는 1902년산 빈센조 포스티글리오네 바이올린에 ‘비욘세’란 애칭을 붙였다. “(세계적 미국 팝스타인) 비욘세의 팬인 데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누구나 비욘세 목소리인 줄 알아보잖아요. 내 악기 소리도 뭘 연주하든 사람들이 바로 ‘대니 음악이구나’ 알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웃음)”
평생 한국에서 살 것이라는 대니 구가 이곳에서 이루고 싶은 꿈은 뭘까. “정말 멋진 명동성당에서 독주회를 해보는 것과 재능이 있지만 가난해서 클래식 음악을 배우지 못하는 중고생들을 위해 국내 최고의 무료 음악학교를 세워 돕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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