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정부는 1998년부터 일본 대중문화를 단계적으로 개방하기 시작했다. 2004년 일본 문화 전면 개방 이후 영화·애니메이션·게임·출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본 문화가 물밀듯이 들어왔다. 하지만 방송가에서 일본어 노래는 마지막까지 넘을 수 없는 금기(禁忌)처럼 여겨져 왔다. 2018년에는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48을 통해 선발된 한·일 합작 아이돌 그룹 아이즈원의 노래 ‘반해버리잖아?’가 일본어 가사가 일부 들어있다는 이유로 KBS, SBS에서 방송 불가 판정을 받았다. 그만큼 왜색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다.
지난 4월부터 MBN이 방송한 음악예능 프로그램 ‘한일가왕전’은 이런 금기를 허무는 계기가 됐다. 특히 통통 튀는 매력을 지닌 스미다 아이코(18)가 부른 곤도 마사히코의 1981년 곡 ‘긴기라기니 사리게나쿠’는 국내 유튜브에서 600만뷰를 넘어설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무명 여가수였다가 이 프로그램의 ‘간판 스타’가 된 우타고코로 리에(50)가 남다른 가창력으로 부른 노래도 유튜브에서 500만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이 프로그램에선 일본 가수들이 한국 노래를, 한국 가수들은 일본 노래를 원곡 그대로 부르기도 했는데 박수를 많이 받았다. 이들은 한국에서 팬미팅을 가질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 23일 방송된 '한일톱텐쇼'는 전국 시청률 5.0%를 기록해 지상파-종편-케이블 포함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최근 TV조선 예능 프로그램 ‘미스터 로또’에선 1980~1990년대 일본에서도 인기를 누렸던 가수 김연자가 데뷔 50년 만에 국내 방송에서 처음으로 일본 노래를 불러 화제가 됐다. 사이조 히데키의 1983년 곡 ‘갸란두(ギャランドゥー‘)가 그것이다. 방송 화면에는 일본어 가사와 한국어 해석을 자막으로 달았다. 김연자는 “일본 대중 음악의 불모지와도 같았던 한국 방송에서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감회가 들었다”고 말했다. ‘왜색의 실질적 해금’이라는 전문가들의 해석이 나온다.
1020 젊은 세대가 일본 문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일본 가수 이마세가 국내 최대 음원 차트 멜론에서 17위에 오르는 등 일본 가수로선 처음으로 톱 100에 진입하기도 했다. 지난달 26, 27일 한국의 걸그룹 뉴진스의 멤버 하니가 도쿄돔 팬미팅에서 ‘푸른 산호초(青い珊瑚礁)'를 불러 신드롬을 일으켰다. K팝 아이돌 그룹이 이미 미국의 빌보드 차트 상위권을 점령하면서 젊은이들의 문화적 자신감이 강해지고 있다. 우리의 문화적 포용성이 커지는 건 바람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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