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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에 모과나무가 여럿 있다. 처음부터 모과나무인 줄 안 것은 아니고, 어느 가을 나무 아래를 걷다가 향긋하고 묵직한 냄새가 나기에 알게 되었다. 가지 끝에 매달린 모과가 주머니에 넣어오고 싶을 만큼 노랗고 반들반들했다. 모과나무는 옆으로 퍼지지 않고 위로 비쭉한 모양새였는데, 그래서인지 숱이 많은 대나무빗자루를 거꾸로 꽂아둔 것 같았다.

모과가 익는 계절이 되면, 특히 11월이 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에는 제법 커다란 모과나무가 있었다. 교장선생님이 아끼기로 소문난 모과나무였는데, 우리 학교의 명물은 운동장을 쭉 둘러심은 커다란 벚꽃나무였기 때문에 평소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운동장을 뒤덮을 정도로 벚꽃잎이 휘날리는 4월이면 거의 전교생이 밖으로 나와 사진을 찍었다. 그러니 학교 건물 앞 좁은 화단에 스스럽게 선 모과나무를 눈여겨볼 이유가 우리에겐 없었다. 다만 가을이 되면 양상이 달라졌다. 학생들은 모과나무 옆을 괜히 서성였다. 모과향이 짙어질수록, 11월이 다가올수록 나무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초조해졌다. 소문 때문이었다. 모과나무에서 몰래 모과를 하나 따내면 원하는 대학에 붙는다는 흔해빠진 소문 말이다.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소문엔 항상 아무도 증명할 수 없는 말들―그래서 그 선배는 서울대에 한 번에 붙었대―이 따라다녔다. 학생들이 모과나무 옆을 뱅뱅 돌면 교무실 창문이 발깍 열리며 선생님 하나가 틀림없이 그 이야기를 꺼냈다. 소문만큼이나 오래 전해져 온 어느 고3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그러니까 고3 아이 하나가 모과를 훔쳐야겠다고 작정한 거야.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교실을 빠져나가 나무 아래 섰지. 모과는 너무 높은 가지에 달려있고 나무를 흔들거나 걷어차면 커다란 소리가 울릴 테고 그러니 어쩌겠어. 나무를 기어오르기 시작한 거지. 어렵게 나무에 올라 모과 하나를 따냈는데, 마침 퇴근하려던 교장선생님과 딱 마주친 거야. 교장선생님이 말씀하셨지. ‘너, 종 치기 전에 거기서 내려오면 대학 떨어진다.’ 자율학습 종료까지는 한 시간 넘게 남아있고 날은 춥고 몸은 줄줄 미끄러지고. 그 애는 한 손에 모과를 움켜쥐고 온몸으로 나무줄기를 꽉 끌어안은 채 나무에 매달려 있었어. 떨어지면 안 돼, 떨어지면 안 돼, 엉엉 울면서.”

너도 그렇게 되고 싶니? 학생들은 숙연해진 마음으로 모과나무를 피해 걸었다. 그럼에도 어느 날에는 기어코 교실에 모과향이, 진득한 단 냄새가 떠돌았다. 나는 졸업한 이후에도 종종 모과나무에 매달린 아이를 떠올렸다. 너무 간절해서 두렵고 무서웠을 마음을 떠올리면 내가 나무에 매달린 것처럼 팔다리가 저리고 욱신거렸다. 그런 간절한 마음을 지나 나는 오늘에 있고, 똑같이 간절한 마음을 지닌 어린 학생들이 내일을 향해 걷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응원할 수밖에, 낯선 이들에게 무한한 성원을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학교 사물함 깊숙이 숨겨두었던 샛노란 모과를 꺼내어 내미는 마음으로.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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