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백악관 귀환을 앞두고 중국이 우군 마련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의 ‘뒷마당’으로 불리던 중남미에 대한 영향력 확보에 나서는가 하면 유럽과 아시아의 미국 동맹국들에도 먼저 손을 내미는 모양새다. 중국은 한국을 향해서도 적극적인 소통 의지를 보이고 있다.
◆美 무관심 틈타 중남미 영향력 확대
중국은 미국이 중남미에 무관심한 틈을 노려 중남미와의 경제적 연계를 강화하고 미국 주도 국제사회 질서에 균열을 내려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14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중국은 남미 최대 경제국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볼리비아, 페루, 칠레, 파나마, 파라과이에서 지난해 교역액 기준 역외 최대 무역 상대국에 이름을 올렸다.
중남미에서 경제 규모 상위에 있는 국가 중 여전히 미국과 가장 많은 교역을 하는 나라는 멕시코와 콜롬비아뿐인데, 이는 2000년 미국이 데이터가 없는 쿠바와 아이티 등을 제외하고는 중남미 전체 국가를 상대로 가장 많은 교역을 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중국은 아르헨티나 리튬, 베네수엘라 원유, 브라질 철광석·대두 구매 시장의 큰 손으로 자리 잡았다. 콜롬비아와 멕시코의 지하철, 에콰도르의 수력발전 댐 등 2861억달러(약 402조원) 규모 인프라 프로젝트도 중국에서 맡아 준공했거나 진행 중이다.
15∼16일 에이펙(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개최지인 페루에는 중국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 사업 자금을 투입한 창카이 항구가 1단계 준공을 앞두고 있다. WSJ은 “중남미를 더는 미국의 뒷마당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중남미 국가들은 일반적으로 미국과 따뜻한 관계를 원하지만, 미국 정부는 종종 중남미에 대한 우선순위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긴다”고 지적했다.
반면 중국의 경우 중남미 국가 지도자의 정치적 성향과는 관계 없이 중앙·지방정부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했고, 이를 계기로 식민주의의 낡은 유물이라고 주장하는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와 결별하는 거버넌스 모델을 중남미에서 추진하고 있다고 WSJ은 설명했다.
영국 런던 정경대에서 중국 영향력을 연구하는 알바로 멘데스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중남미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며 “글로벌 사우스(주로 남반구에 위치한 신흥국과 개도국)에는 이런 인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근 미국 행정부의 대(對)중남미 정책이 불법 이민과 마약 억제에 기울어져 있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수십 년 전과 달리 현재 중남미에서는 전반적으로 정치안정화와 중산층 증가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이 중남미에 중국과의 관계를 제한하도록 강요할 경우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분석한다.
미국 싱크탱크인 ‘미주대화’의 마이클 시프터 선임연구원은 WSJ에 “중남미 국가에서는 (트럼프 집권) 4년 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려하고 있다”며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인상은 일부 중남미 국가를 잠재적으로 중국에 더 가깝게 만들 수 있다”고 예상했다.
WSJ은 시 주석이 중남미에 관심을 기울이는 주요 동기 중 하나는 대만 고립도 꼽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 중국은 최근 몇 년 간 금전 외교를 바탕으로 도미니카공화국,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온두라스 등을 대만에 등 돌리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시아·유럽의 미 동맹국에도 구애 나서
WSJ는 앞서 10일에는 트럼프 당선인이 예고한 대(對)중국 ‘관세 폭탄’을 방어하기 위해 중국이 아시아와 유럽의 미 동맹국에 구애하려 한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매체는 중국 정부의 의사결정에 정통한 관계자들을 인용해 트럼프 당선인의 대중 고율 관세 공약이 현실화할 경우에 대비해 중국이 미국 동맹국들에 관세인하, 비자면제, 투자제안 등 인센티브 제공 계획을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트럼프 당선인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중국 상품에 60%에 달하는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나머지 국가의 수입 상품에도 10∼20%의 보편 관세를 매기겠다는 구상을 밝힌 바 있다. 이 공약이 현실화할 경우 가뜩이나 흔들리는 중국 경제에 미칠 충격을 상쇄하고자 시 주석을 비롯한 최고 지도부가 미국의 전통적 동맹국들을 미국으로부터 떼어낼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들에 따르면 중국 경제 정책 실세인 허리펑(何立峰) 국무원 부총리도 최근 서방 기업인들과 회의에서 중국이 외국인 투자와 유럽 및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의 무역을 촉진하고자 다양한 분야에서 '주도적인' 관세 인하를 검토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중국이 관세인하를 고려하는 분야는 국가에 따라 수산물, 기타 농산물뿐만 아니라 전기·통신 장비도 포함된다고 관계자들은 말했다.
리창(李强) 중국 총리도 지난 5일 상하이에서 열린 제7회 중국 국제 수입 박람회에서 외국인이 중국 시장에 접근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일방적 개방을 추구하겠다고 말했다.
중국은 이 새로운 개방 전략을 통해 트럼프 당선인이 집권 1기 때처럼 동맹국에 종종 적대적 태도를 보일 것이라는 아시아·유럽 국가의 두려움을 활용하려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를 통해 중국이 주도권을 잡고 미국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면서 미국과 그 동맹국 사이에 균열을 내려 한다는 것이다.
다만 미 동맹국들이 중국의 이러한 유인책을 경계하고 트럼프 차기 행정부와 틈이 벌어질 수 있는 입장에 놓이지 않으려 할 가능성이 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적했다. 특히 유럽 국가들의 경우 중국이 그동안 무역 관련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며, 중국의 유럽시장 접근성을 높일 경우 중국 기업이 유럽 기술을 빼갈 수 있다고 우려한다고 신문은 덧붙였다.
◆한국에도 관계 개선 신호 잇따라 보내
중국은 특히 한국을 최근 일방적 무비자 대상에 포함한 데 이어 4개월 간 공석이었던 주한 중국대사를 내정하는 등 한·중 관계 개선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중량급 인사로 여겨지는 다이빙(戴兵) 주유엔 중국 대표부 부대표를 신임 주한 중국대사로 내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7월 전임 싱하이밍(邢海明) 대사 이임 후 4개월여 만이다.
다이 부대표는 2017년부터 중국 외교부 아프리카사장(국장)을 지내다 2020년 유엔에 부임했다. 중국이 그간 주한 대사에 국장급을 보임해왔다는 점에서 이번 인선은 전례를 따른 것으로 보이지만, 다이 부대표가 다자외교의 정점인 유엔에서 활약하다 한국으로 온다는 점에서 이전 대사들과는 무게감이 다르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 외교 소식통은 이와 관련해 “급을 높였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중국이 한반도 문제를 글로벌 이슈 속에서 살피겠다는 의지의 표명일 수 있다”고 말했다.
한·미·일 안보 협력 구도에 중국이 반발하면서 한동안 냉각됐던 한·중 관계는 트럼프 당선인의 선거 승리 전후로 긍정적 흐름이 잇따라 관측되고 있다. 중국은 지난 8일부터 여행·비즈니스 등을 목적으로 15일 이내 기간 중국을 방문하는 한국 일반여권 소지자를 대상으로 비자 발급 면제에 들어갔다. 양국이 서로 비자를 면제하는 무비자 협정이 아니라 중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비자 없이 외국 여행객을 맞아들이는 조치다. 중국이 한국을 무비자 대상에 포함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중국 정부가 작년 말부터 일방적 무비자 국가를 확대해왔으나 그 범위는 대부분 유럽이나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 사업 협력 국가였고, 한국을 새로 무비자 대상에 포함한 발표는 주중 한국대사관조차 사전에 알지 못한 조치였다는 점에서 더 눈길을 끌었다.
이런 변화를 두고 트럼프 2기 개막을 앞둔 상황에서 중국이 한국 등 상대국을 압박하던 ‘전랑(戰狼·늑대전사)외교’에서 유화적인 ‘판다외교’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실제로 미국 대선을 앞둔 올해 중반부터 중국은 미·중 경쟁 속에 갈등을 빚던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에 부쩍 공을 들여왔다. 성균중국연구소는 지난 11일 공개한 ‘미국 대선 분석 특별 리포트’에서 “트럼프의 재집권은 미국 동맹 체제의 균열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중국은 바이든 정부 시기 소원해졌던 미국 동맹국들과의 관계 개선 기회를 모색하고자 할 것”이라며 “한국도 대(對)중국 관계 회복에 나설 시점이고 전략적 모호성이 강대국 경쟁에 대한 한국의 대응책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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