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되어 1990년대 초 소련의 붕괴로 막을 내린 냉전은 전쟁에 가까운 긴장과 대립의 상태였지만, 역설적으로 미국과 소련 간 직접 충돌이 없었던 오랜 평화의 시기였다. 그러나 동아시아로 시선을 돌리면 상황은 달랐다. 유럽에서는 미·소 간 힘의 균형이 평화를 유지했지만, 식민지 경험, 이념 대립, 민족주의가 얽힌 동아시아는 초강대국의 대리전 구도 속에서 복합적 성격의 전쟁이 잇따라 발발했다.
그 시작은 중국이었다. 냉전 초기, 미국의 대소 봉쇄 전략의 최전선에 있었던 중국 국민당은 공산당에 패배하며 대륙을 상실하고 타이완으로 퇴각했다. 중국 공산화는 소련 스탈린에게 팽창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이는 북한 김일성의 남침 요청을 승인하는 주요 계기가 되었다. 중국 공산화 저지 실패에 대한 책임론에 직면했던 미국은 북한의 남침에 신속히 개입했다. 참전과 함께 미국은 타이완 방어를 위해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했고, 전세를 뒤집은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중국은 이를 미국의 위협적 봉쇄 전략으로 간주하며 전쟁에 개입했다. 그러나 미·중은 군사적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전쟁은 휴전 회담과 함께 무승부를 목표로 하는 제한전 형태로 전환되며 결국 정전으로 종결되었다.
6·25전쟁은 냉전을 군사적 대립으로 바꾼 전환점이었다. 미국의 정책 변화에 따라 일본은 재무장을 시작했고, 유럽에서는 군비 증강이 이어지며 냉전 체제가 공고해졌다. 6·25전쟁이 끝난 뒤에도 동아시아에서는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고, 전쟁의 중심축은 인도차이나로 옮겨갔다.
1954년 프랑스군이 베트민(베트남 독립동맹회)에 패배하면서 미국의 개입이 본격화되었고, 1964년 베트남전쟁이 발발했다.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소련과 중국 등 공산 진영의 지원을, 남베트남은 미국과 한국 등 자유 진영의 지원을 받으며 전쟁은 격화되었다. 한국은 베트남에 군단급 병력을 파병했고, 북한도 일부 병력을 파견하며 전쟁은 일종의 남북 간의 대리전 양상을 띠었다. 이 시기 한반도에서 남북 간 무력 도발도 절정에 달했으며, 1968년 1월 북베트남의 뗏 공세와 맞물려 북한이 자행한 청와대 기습과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으로 남북 및 북·미 갈등은 극대화됐다.
이처럼 냉전 시기 동아시아에서는 한 지역의 충돌이 다른 지역으로 파급되며 열전이 이어졌다.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과 베트남전쟁의 종결로 일련의 열전이 끝났다고 볼 수 있지만, 이후에도 한반도와 타이완 등지에는 여전히 무력 분쟁의 불씨가 남아 있었다. 이는 결국 중국의 부상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미·중 간 대립이라는 신냉전의 시대로 이어졌다. 현재 동아시아의 상황은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국면이 아니라, 냉전 시기 동아시아 지역의 열전이라는 복합적 역사적 유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군사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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