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의 위엄’ 고정관념 지우고
비움 공간 등장… 관계 맺음 중시
북촌 골목, 크고 작은 마당 연결
서울 어디에서든 자유롭게 출입
관람객들에게 동선의 자유 부여
서울 북촌을 대표하는 도시적 특징은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옥과 그 사이를 구불구불 흐르는 골목이다. 그런데 그런 특징에 아랑곳하지 않고 꽤 긴 시간 담으로 둘러싸여 주변과 단절된 땅이 있었다. 그 안으로는 사람뿐만 아니라 시선도 들어갈 수 없었다.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 맞은편 땅에 처음 들어선 시설은 종친부(宗親府)였다. 조선 시대 역대 왕의 혈통을 적은 책(계보)과 초상화(어진)를 보관하고 왕과 왕비의 의복을 관리하며, 종친의 인사 문제를 의논했던 종친부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2년이 지난 1907년 폐지됐다. 종친부의 배치는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림을 보면 ‘종친부’라는 현판이 걸린 솟을대문이 정문이고 그 안쪽으로 ‘선원록아문(璿源錄衙門)’과 ‘관대청(官大廳)’이 일자로 놓여 있다. 현재 복원된 경근당과 옥첩당은 관대청과 그 남쪽에 있었던 선원보각이 바뀐 것이다.
종친부가 사라지고 6년이 지난 1913년 일본군 수도육군병원이 그 땅에 들어섰다. 이후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으로 바뀌었고 외래진찰소와 진료소가 차례로 추가됐다. 이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건물은 외래진료소다. 조선총독부 관방회계과에서 설계한 외래진료소 건물은 1933년에 준공됐는데, 초기 모더니즘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해방 후 이 땅에 있었던 건물들은 모두 의료 시설로 쓰였다. 그러다 1971년 국군수도통합병원이 강서구 등촌으로 이전하면서 국군기무사령부(현 방첩사령부)가 들어섰다. 당시 대통령이 군 출신이었으니 군사 정보를 수집하고 수사를 전담하는 기무사를 청와대 가까이 두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기무사가 과천으로 이전하기까지 37년 동안 이곳은 실제로 있지만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안 되는 유령과도 같은 장소였다.
기무사를 이전하고 그곳에 미술관을 세우자는 의견은 미술계에서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미술계의 주장은 그동안 나라에서 지은 문화전시시설 대부분이 워낙 외진 곳에 있으니 국립미술관만큼은 일반 시민들이 접근하기 편한 곳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기무사가 이전하고 1년이 지난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건립 기본계획’을 수립하며 미술계의 기대에 부응했다. 이듬해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건축설계 아이디어 공모’에서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다섯 팀을 지명 초청하여 최종 설계자를 선정하는 과정도 진행했다.
지명된 다섯 팀의 설계안에는 광장이나 마당 같은 ‘비움의 공간’과 북촌을 대표하는 ‘골목’이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비움의 공간과 골목은 미술관 건물과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다. 설계자로 최종 선정된 건축가 민현준(mp_Art건축)은 다양한 크기의 마당들이 건물의 외피가 되어 마당의 형상이 강조되고 정체성(identity)으로 인지되는 미술관이 되기를 바랐다.
사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이 지어지기 전에 이 땅에 있었던 시설 안에도 마당과 같은 공간은 있었다. 하지만 높은 담으로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에 골목은 있을 수 없었다. 주변 골목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담장 안의 공간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단순한 이동이나 주차 아니면 기무사 간부들의 테니스장 정도로만 쓰였다.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다섯 팀이 원래부터 이 땅에 없었던 골목을 도시의 맥락(context)이라 전제하고 이를 통해 땅의 안팎을 연결하려 했던 이유는 자신들이 계획한 비움의 공간을 미술관 이용자들뿐만 아니라 북촌을 유영하는 사람들도 쓸 수 있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건축가 민현준이 제안한 ‘군도형 미술관’의 핵심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주변 어디에서든 다양한 경로를 통해 미술관으로 들어와 산재해 있는 전시장을 선택적으로 둘러본 뒤 다시 주변 어딘가로 흩어지는 ‘네트워크형 동선’이다.
실재하지 않았던 골목을 도시적 맥락이라 제시하며 주변 지역의 특징을 땅 안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던 시도는 다른 국립미술관이나 박물관과 비교하면 상당히 변화된 접근이다. 왜냐하면 기존 국립미술관이나 박물관은 주변 도시적 맥락을 고려할 필요가 없는 산 중턱 외진 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산 중턱’이라는 특징 외에 고려할 주변 맥락이 없는 상태에서 설계자가 주목할 수밖에 없는 건 나라가 지은 문화전시시설이니 으레 지녀야 한다고 학습된 엄숙함과 위엄 그리고 기념비다. 발주 기관에서 원했던 것도 있었겠지만 건축가들은 이런 요구에 대한 답을 전통 건축에서 찾았다. 산속 사찰, 능선을 따라 놓인 산성은 그렇게 산 중턱에 있는 국립 문화전시시설의 공간 구성과 형태의 아이디어가 됐다.
대표적인 예가 접근 과정에서 영주의 부석사를, 건물 형태에서 수원 화성을 차용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이다. 특히, 수원 화성은 일방향의 관람 동선에 적합한 긴 형태의 건물과 창이 필요 없는 문화전시시설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전통 건축이다.
그런데 다른 시각에서 보면 국립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설계한 건축가들이 전통 건축을 언급하는 건 앞서 말한 의도보다는 다른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건 성벽처럼 안과 밖이 완전히 단절되거나 강력한 하나의 방향성을 지닌 구성 외에 다른 대안을 생각해 내지 못하거나 전통 건축을 닮은 외관 말고는 다른 형태를 상상하지 못하는 한계를 감추려는 목적일 수도 있다.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이 북촌 한가운데에 개관하면서 그간 중규모의 미술관이나 소규모의 갤러리만 있었던 북촌에 대규모 문화전시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는 북촌에 있는 문화전시시설의 생태계가 더 커졌음을 의미한다. 어떤 생태계든 대중소가 섞여 있을 때 지속 가능하고 무엇보다 다양성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실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이 개관한 이후 8년이 지나 옛 풍문여고 자리에 서울공예박물관이 개관했고 2028년에는 송현문화공원에 이건희 기증관이 준공될 예정이다. 세 대형 문화전시시설은 모두 단일 건물이 아닌 몇 개의 건물로 나뉘어 선택적으로 관람할 수 있는 군도형 미술관을 지향한다.
사람들이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는 이유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예상치 못한 독특함을 느끼고 영감을 얻기 위해서다. 그래서 뮤지엄(museum)은 영감을 전하는 여신(muse)이 사는 신전(-um) 이다. 중소 규모의 미술관과 갤러리뿐만 아니라 세 개의 대형 미술관과 그 사이사이에 음식점, 카페 그리고 이 모두를 잇는 골목이 있는 북촌은 이제 방문자들 각자가 조합한 각기 다른 미술관과 박물관이 탄생하는 동네가 될 것이다. 북촌의 미래는 외진 곳에 지어진 문화전시시설들은 만들 수 없는, 미술관과 박물관이 도시와 어우러져 새로운 삶의 풍경을 만드는 ‘뮤지엄 스케이프(Museum-scape)’이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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