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 선포 13일만에 열린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여당이 조국혁신당 김준형 의원에게 위원직 사임을 요구했다. 김준형 의원은 12·3 비상계엄 선포 당시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국 대사의 전화를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처음 밝혀낸 당사자다.
16일 국회 외통위 전체회의에서 국민의힘 간사인 김건 의원은 회의가 시작하자 의사진행발언을 통해 “김준형 의원께서 ‘주한 5개국 대사들이 만나 경주 에이펙(APEC)을 포함해 모든 국제회의를 보이콧하겠다, 미국 대사가 윤석열정부 사람들하고는 상종을 못하겠다고 보고했다’ 등의 발언을 했다”며 “금도를 넘었다”고 말했다. 이어 “주한 미국 대사관은 공식 SNS(소셜미디어)를 통해 김준형 의원이 언론에 필립 골드버그 대사의 발언이라고 주장한 내용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며 “특히 ‘어털리 펄스(utterly false)’, 외교적으로 잘 쓰지 않는 용어로 ‘완전히 가짜’란 뜻으로 상당히 불쾌감이 묻어난다”고했다.
또 주한 영국 대사관, 주한 호주 대사관이 에이펙 개최를 지지할 거라고 공식입장을 밝힌 것을 들어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국익을 훼손하고 국민 우려를 증폭하고 한미동맹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며 “위원회 앞에 사과하고 스스로 외통위원직을 사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상대방으로부터 이렇게 반박당할 발언을 하시는 것에 대해 실망을 금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조태열 외교장관도 김준형 의원 질의에 답하는 과정에서 ‘윤석열 정부 인사들을 상종을 못하겠다’는 부분이 영어로 뭐였냐고 따지기도 했다.
김건 의원은 외교부 관료 출신이다. 북핵 문제를 총괄하는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으로 일하던 중 총선으로 직행해 논란이 인 바 있다. 정치적 중립 의무가 있는 현직 공무원 신분에서 공백없이 총선에 직행한 점, 이로 인해 북핵 업무 공백 발생이 불가피하다는 점, 외교부 조직개편을 통해 한반도평화교섭본부가 폐지되는 가운데 본부 수장이었던 ‘선배’만 총선으로 직행한 점 등 여러 측면에서 극히 이례적이었기 때문이다.
외통위에서 위원장을 맡고 있는 국민의힘 김석기 의원도 “미국 대사관이 공개적으로 부인했고, 에이펙 관련 개최지 경주는 대단한 혼란을 겪고 있다”며 “김 의원은 발언의 배경을 입증하지 않으면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주는 김석기 의원 지역구다.
김준형 의원은 “매우 믿을만한 제보고, 조태열 장관도 당시 미국 대사의 전화를 안 받았다고 확인했다”며 “전화를 안 받는데 미 대사가 ‘이 사람들 정말 착한데 바쁜가봐’라고 했겠냐. 어구가 문제가 아니다,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했다. 이어 “(미 대사가) 주재국에 대한 불만을 본국 정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면 주한 미국 대사의 자격이 없는 것”이라며 미국 대사는 당연한 일을 한 것임을 강조했다. 김준형 의원은 소장학자 출신 미국통으로 문재인정부에서 국립외교원장을 지냈다.
그는 이어 “한미동맹을 망친 게 정부·여당인데 저한테 망친다니…”라며 “매우 유감”이라고 했다. 또 “저뿐 아니라 계엄 관련 전후 상황이 미국의 내부고발자에 의해 제보가 된다는 점을 말씀 드린다”고 했다. 에이펙을 거론한 김석기 위원장을 향해서는 “저도 포항에서 25년 교수를 했고 경주 개최를 위한 특별결의안도 기꺼운 마음으로 찬성한 사람“이라며 “저는 (에이펙 보이콧을 비공개 논의한 5개국 관련) 혹시라도 해가 될까 (국명을 언급하지 않고) 우방 주요국이라고 했고 거의 동시에 중앙일보에서 ‘파이브아이즈’(미국·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라고 보도한 것인데 정치적으로 본말을 전도하고 있다”고 했다. 배경을 입증하란 발언을 두고 “제보자를 밝히라는 것”이냐고 반발하고 “국민이 뽑은 의원을 동료 의원이 무슨 자격으로 사임하라고 하느냐”고 했다.
12·3 ‘윤석열 비상계엄’ 사태 직후 국회 각 상임위들은 신속히 전체회의를 열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외통위는 그러지 못했다. 계엄 9일만인 11일 회의가 열렸으나 국민의힘 의원들과 정부 관계자는 모두 불참하고 야당 의원만 참석했다. 정부 관계자는 “여야 합의가 안됐던 것으로 안다”며 당시 불참 이유를 말했다. 당시 미국에서 연일 윤 대통령의 계엄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메시지가 나오고 있고, 당시 탄핵 전이라도 사실상 직무 수행이 불가능해진 윤 대통령과 과도기 정부의 외교공백을 메울 대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특히 미국 정부가 대외에 내는 공식입장과 달리, 미국 조야를 통해 흘러나오는 미국 정부 기류는 심상치 않은 상황이었다. 이번 비상계엄이 한국이 군을 자의적, 독단적, 불법적으로 움직였다는 측면에서 군사동맹인 한미동맹의 신뢰가 근본적으로 타격을 입은 것이며, ‘앞으로 미국이 한국군을 믿을 수 있는거냐’는 근본적 회의까지 들게 했다는 것이다. 이때문에 차기 한국 정부에 큰 짐이 될거라는 우려도 상당한 상황이다. 미국이 “한미동맹은 특정 정부를 뛰어넘는 것“이라고 강조한 배경도 이러한 기류와 무관치 않다.
이날 회의에서는 외통위를 2주에 한번 개최하는 것으로 정례화하고 위원장, 여야 간사와 정부 관계자가 함께 외교안보 상황을 매주 점검하자는 더불어민주당 간사 김영배 의원의 제안도 나왔으나 여당 간사인 김건 의원은 반대했다.
김건 의원은 “상임위를 개최하면 (공무원들이) 여기 나올 것을 준비하고 나와서 답변하는 이런 것이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소모돼 외교에 들어갈 에너지가 분산되기 때문에 전체적인 걸 고려해서 필요할 때 여야 합의해서 하면 된다”고 말했다.
민주당 위성락 의원은 “지금 정부는 과도 상태로 국민에 의해 선출된 권력이 아니고 헌법에 따라 한시적으로 권한을 위임받은 정부”라며 “이런 정부가 대외적으로 활동하려면 좀더 국민 소통을 통해 자기 위치를 강화할 필요가 있고, 그래야 외국에서도 이 정부와 의미있는 소통을 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반박했다. 이어 “그런데 이 과정을 ‘외교하는데 에너지가 분산된다, 직원이 힘들어진다’, 이런 건 완전히 관료적 관점”이라며 “이 정부가 생각이 똑바르다면 오히려 먼저 그걸 함께 하자고 해야한다. (정례화 반대에) 강력 이의를 제기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김준형 의원 사퇴 요구와 외통위 정례화를 두고 공방이 벌어진 외통위 오전 회의에서는 김건, 김기웅 의원만 줄곧 자리를 지켰다. 윤상현, 안철수, 김기현 의원은 자리에 있다가 회의 중 이석했다. 김태호, 인요한 의원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편 김준형 의원이 제기한 계엄 당시 골드버그 대사 전화에 응하지 않은 우리 정부 인사는 조태열 장관 외에도 현 정부 외교실세로 불려온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있으나, 김 차장의 입장은 현재까지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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