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향한 서쪽 경부고속도에 가로막혀
비행체의 모습 건물 주변으로 확장 못해
초·중·고 단체 관람객 절반 넘게 차지
본관 로비·각층 체험관 등 필요 이상 커
트렌드 맞춰 체험 직업 주기적으로 바꿔
AI시대 일 아닌 여가에 할일 다루게 될 듯
“나중에 어른이 되면 무슨 일을 하고 싶어?”
어릴 적 이런 질문을 받으면 의사나 과학자와 같은 특정 직업을 말했다. 물론 현재 내 직업을 답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당시에는 지금 내가 하는 일을 알지 못했다. 솔직히 지금의 일을 선택할 때 나의 적성, 미래 전망, 기대 수익 등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냥 수능점수에 맞게 학과를 선택했고 운 좋게 그 학과에 잘 적응해 지금의 직업을 갖게 됐다. 그런데 직업을 선택하는 이런 과정이 비단 나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닌 것 같다.
2001년 말 노동부는 ‘고용안정업무 발전계획’의 하나로 ‘직업박물관 및 직업정보도서관 건립 추진 방침’을 결정했다. 한국잡월드의 시작이 되는 내용이다. 한국잡월드는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다양한 직업 체험과 탐색의 기회를 제공하고 건전한 직업관과 근로 의식 형성을 유도하여 자신에게 맞는 진로 및 직업 선택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됐다.
공모를 통해 성남시로 입지를 결정하고 2007년 ‘잡월드 건립을 위한 건축설계경기’가 열렸다. 당선자는 ‘드림 플라이트(Dream Flight)’라는 개념을 제안한 삼우설계였다. 설계자는 대지 동쪽에 있는 잡월드사거리(옛 백현사거리)를 가운데 꼭짓점으로 하는 오각형 형태의 필지, 주변 외부공간의 활용성, 추후 확장성을 고려하여 ‘<’자 평면으로 건축물을 설계했다. 날개처럼 펼쳐진 양쪽 건물 가운데에 광장을 배치했는데, 광장이 향해 있는 잡월드사거리는 다소 휑하기는 하지만 수인분당선 수내역과는 가장 가까운 방향이다. 무엇보다 건물이 ‘<’자 형태로 지어지면서 대지 북서쪽과 남서쪽 모서리에 시설이 확장될 수 있는 유보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실제 한국잡월드 본관이 개관하고 8년이 지난 2020년 본관 북쪽에 ‘숙련기술체험관’이 지어졌다.
삼우설계는 계획안의 상징성을 “미래를 향한 비행”으로 설명했다. ‘기본설계 설명서’에도 ‘비행체’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건물의 입면에 대해서는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는 유선형의 선박 형태를 통해 미래의 바다를 항해하는 청소년의 꿈을 형상화”했다고 이야기한다.
날개처럼 양쪽으로 벌어진 건물이 서쪽을 향해 있으니 한국잡월드 본관을 ‘비행체’나 ‘선박’으로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 부자연스럽지는 않다. 다만 건물 디자인의 시작점이 ‘비행체’나 ‘선박’에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대지가 지닌 조건에 맞는 최적의 건물 형태를 찾는 과정에서 이러한 상징이 도출됐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꿈과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비행체나 선박”이라는 디자인 이야기(narrative)가 건물 주변으로 확장되기보다는 건물 자체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한국잡월드 본관이 나아가는 방향인 서쪽에는 마치 비행체와 선박의 앞을 가로막는 바리케이드처럼 왕복 12차로의 경부고속도로와 왕복 9차로의 대왕판교로가 지나간다. 물론 두 간선도로 너머로 광교산과 바라산이 보이기는 하지만 한국잡월드 본관이 마치 비행체나 선박처럼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는 듯한 이 장면을 방문자들이 확인할 방법은 없다.
사실 한국잡월드 본관은 무언가를 상징하거나 명징한 디자인 이야기를 전달하기보다는 넓고 기능을 충실히 담아내는 역할이 더 중요한 건물이다. 로비를 비롯해 각 층의 체험관, 많은 테이블이 놓여 있는 휴게공원 심지어 화장실까지 한국잡월드 본관의 각 실은 얼핏 보면 필요 이상으로 큰 것 같다. 하지만 초·중·고등학교에서 관광버스를 대절해 직업 체험 수업을 오는 단체 관람객이 한국잡월드 방문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쉽게 수긍할 수 있는 규모다. 실제 2023년 한국잡월드 이용객 47만3000명 중 26만2000명(55.3%)이 단체 이용객이었다(‘통합데이터 지도’ 홈페이지 참조).
한국잡월드는 변화하는 사회상과 직업 트렌드를 반영하여 체험할 수 있는 직업을 주기적으로 바꾸고 있다. 그런데 한국잡월드가 ‘미래의 직업과 노동’에 대해 다루다 보면 결국 앞으로 해야 하는 ‘일’이 어떤 성질을 지니게 될지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럼, 그 성질은 뭘까?
일과 관련돼서 근래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챗GPT의 등장이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챗GPT는 그때까지 그렇게 와닿지 않았던 4차 산업혁명을 실감시키는 단초가 됐다. 그리고 2년 동안 AI는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이제 회사에서 일할 때 모르는 언어는 물론이고 영어와 국문 간의 번역 또는 다소 검증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정보를 찾는 작업은 AI를 이용한다. 녹음 내용을 들어가면서 회의록을 쓴다거나 적절한 이미지를 찾는 데 시간을 쓰지도 않는다. 회사에서 챗GPT는 완벽한 동료는 아니지만 괜찮은 보조자다.
AI의 활용도가 높아질수록 몇몇 전문가는 미래에 사라질 노동과 직업을 구체적인 수치와 함께 예측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암울한 전망보다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건 AI가 인간이 해 온 ‘생산’이라는 활동을 대신하게 될 때 그 시간에 인간이 해야 할 일이다. 사실, 이런 고민은 AI보다 훨씬 단순한 기계가 등장했을 때부터 시작됐다.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사회비평가이기도 했던 버트런드 러셀은 1935년에(무려 89년 전이다) 출판한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수필집에서 인간을 대신해 생산을 담당하는 기계를 도입하여 노동 시간을 줄여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4시간만 일해도 된다고 썼다. 그리고 줄어든 노동 시간으로 생긴 시간(여가·餘暇)을 스스로 알아서 적절한 곳에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셀에게 ‘여가’는 “문명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당장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상상만 해보자.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러셀이 4시간 노동만으로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 생활필수품과 기초 편의용품을 제공할 테니 남은 시간은 알아서 쓰라고 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노동에서 해방된 삶을 상상한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함께 쓴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에서 아침 사냥, 오후 낚시, 저녁 축산 그리고 저녁 식사 후 토론하는 사회를 노동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삶으로 묘사했다. 두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두 사람과 달리 러셀은 ‘여가를 현명하게 사용하는 데 필요한 안목을 제공’하는, 그렇지만 지식인을 목표로 하지 않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만약 이런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가장 적절한 주체는 한국잡월드일 것이다. 이런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최소한 “커서 무슨 일을 하고 싶니?”라는 질문 속에 ‘무슨 일(Job)’은 근무 시간에 하는 일(Work)이 아닌 여가에 할 일(Activity)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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