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서 흔히들 하는 말이 있다. 감기나 몸살에 걸려서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오히려 힘을 빼는 효과가 생겨 더 좋은 활약을 보이곤 한다고. ‘감기 효과’라는 말을 하기 민망할 정도로, 27일 화성종합체육관에서 열린 도로공사와의 경기에 임한 IBK기업은행의 아웃사이드 히터 육서영의 몸 상태는 너무나 힘들어 보였다. 기침과 코맹맹이에 갈라지는 목소리는 기본에 눈도 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인 지난 24일 선수단에 돈 감기에 걸렸다. 감기약도 먹지 못했다. 혹시 도핑에 걸릴까봐. 해열제만 먹고 고열만 다스려야 했다.
다행히 해열제는 잘 들었다. 고열은 없지만, 모든 감기 증상을 다 보이는 몸 상태 속에서 육서영은 올 시즌 최고의 활약을 펼쳐보였다. 이날 육서영의 성적표는 블로킹 2개 포함 16득점. 공격 성공률은 60.87%에 달했다. 공격 효율도 성공률과 동일했다. 공격 범실이나 상대 블로킹에 걸린 게 하나도 없다는 의미다. 그만큼 육서영의 이날 공격은 완벽했다. 2세트까지는 공격 성공률이 71.43%에 달하기도 했다.
육서영의 맹활약 속에 IBK기업은행은 도로공사를 상대로 세트 스코어 3-0 셧아웃 승리를 거뒀다. 승점 3을 보탠 IBK기업은행은 승점 31(11승6패)이 되며 정관장(승점 31, 11승6패)과 승점과 승패에서 모두 동률을 이뤘다. 세트득실 1.286으로 정관장(1.379)에 밀려 순위는 4위를 그대로 유지했다. IBK기업은행과 정관장은 31일 3라운드 마지막 경기에서 일전을 벌인다. 이날 승부에 따라 전반기 3,4위의 주인이 가려진다.
경기 내내 마스크를 쓰고 플레이했던 육서영은 수훈선수 인터뷰에도 마스크를 쓰고 들어왔다. 육서영은 “저도 왜 이렇게 잘 풀렸는지 모르겠다. 저뿐만 아니라 선수단에 여러 선수가 감기에 걸려있다. 어지럼증이 있었지만, 코트에서는 최대한 집중하려고 했던 게 효과가 있었다”면서 “감독님이나 코치님들이 ‘왜 아프니까 더 잘 하냐’라고 하시던데, 평소에 제가 힘을 많이 써서 공격을 했다면, 아프면서 힘을 빼고 때린 게 득이 된 것 같다”라고 맹활약의 비결을 분석했다.
함께 수훈선수 인터뷰에 들어온 세터 천신통과의 호흡도 만점이었다. 육서영은 “어제 통역을 통해 (천)신통 언니가 제게 이런 볼을 줬으면 좋겠다고 전달했다. 어떤 볼이 올 때 공격수가 때리기 힘들다를 보여준 영상이었는데, 신통 언니가 그런 토스를 진짜 하나도 주지 않아서 편하게 때릴 수 있었던 것 같다”라고 말하자 천신통은 “서영이 말대로 소통이 호흡에 도움을 줬다. 아프면서도 잘 때려줘서 너무 놀라웠다”라고 화답했다.
2019~2020시즌에 프로에 입단한 육서영은 올 시즌에 어느덧 6년차 선수가 됐다. 올 시즌 이전 커리어하이는 2022~2023시즌의 270득점. 올 시즌은 아직 전반기를 다 마치지도 않았는데, 188득점. 후반기 남은 일정을 감안하면 프로 데뷔 첫 300득점 이상은 너끈히 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공격 성공률 35.29%는 전체 10위에 해당하며 리시브 효율도 32.34%로 10위에 올라있다. 데뷔 때부터 공격력은 인정받았던 육서영이지만, 리시브가 약점으로 꼽혔는데 이제는 리시브도 준수한 정도로 올라섰다. 완성형 아웃사이드 히터로 거듭나고 있는 육서영이다.
올 시즌 물오른 활약에 대해 육서영은 “비시즌 때 감독님이 저를 믿어준 부분도 있고, 저희만 아시아쿼터 슬롯을 세터로 쓰다보니 호흡적인 측면을 더 많이 준비해야 했던 게 시즌에 들어와서 효과를 보는 것 같다”라면서 “우리 팀 리시브 라인을 보면 제가 상대여도 저한테 때릴 것 같다. 그래서 모든 서브가 나한테 온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마음을 먹고 있다. 리시브가 잘 되지 않아도 신통 언니가 좋은 토스로 연결할 수도 있고, 동료들이 득점을 내줄 수도 있기 때문에 리시브 자체에 부담을 가지지 않으려고 한다. 그게 비결이라면 비결이다”라고 분석했다.
2001년생인 육서영은 2025년이 되면 뱀의 해, 즉 자신의 해를 맞이한다. 육서영은 “내년엔 반드시 봄배구를 하고 싶다”라고 각오를 다졌다.
IBK기업은행은 전반기 내내 아웃사이드 히터를 육서영과 황민경을 주전으로 썼다. 연봉 7억원을 받고 IBK기업은행에 FA 이적한 이소영은 어깨 부상으로 인해 전반기에는 후위 세 자리만 소화하는 역할에 그쳤다. 후반기부터, 이르면 31일 대전 정관장전부터는 선발 출장이 가능하다. 이제 육서영은 아웃사이드 히터 두 자리를 두고 이소영, 황민경과 경쟁해야 한다. 네임 밸류나 연봉은 육서영이 가장 떨어지는 게 사실이지만, 현재의 폼만 놓고 보면 육서영이 주전으로 뛰지 않을 이유가 없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육서영은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게 맞다. 누구의 자리라고 정해놓기 보다 코트 위에선 항상 제몫을 해내고 싶다. 서로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한다”면서도 “그래도 선발로 뛰고 싶긴 하다”라고 주전 경쟁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올 시즌을 마치면 육서영은 생애 첫 FA 자격을 획득한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의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의식이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지금 상황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며 제 개인 성적보다는 팀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게 먼저다”라고 말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