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8일. 인천 삼산월드체육관 근처에는 봄꽃이 활짝 피었다. 벚꽃과 목련이 아직 흐드러지게 피진 않았지만, 한국 배구가 낳은 역대 최고의 슈퍼스타를 떠나보내기엔 화창한 날씨도, 이제 막 피어오른 꽃봉오리의 아름다움도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흥국생명의 ‘배구여제’ 김연경(37)이 코트 위의 영원한 별이 되어 우리의 곁을 떠났다. 떠나는 순간까지 극적이었다. 2024~2025 V리그 여자부 챔피언결정전 5차전에서 34점을 몰아치며 흥국생명의 세트 스코어 3-2 승리를 이끌었다.
홈인 인천에서 1,2차전을 모두 승리하고 대전 원정을 떠나면서 다시 인천으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지만, ‘배구의 신’은 그를 쉽사리 코트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3,4차전 모두 풀세트 접전 끝에 패했다. 3,4차전 도합 61점을 퍼부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100%, 아니 200%를 쏟아 부었지만, 벼랑 끝에 몰려 강하게 저항하는 정관장의 에너지를 진압해내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치르게 된 ‘외나무 다리’ 승부의 5차전. 이기든 지든 이제는 더 이상 코트 위에 설 수 없는 김연경은 20여년간 세계 최고의 아웃사이드 히터로 활약하며 터득한 기량과 경험, 노하우를 코트 위에 쏟아 부었다. 득점 하나하나에 환호하고, 동료들의 파인 플레이에 포효하며 팬들의 열광을 이끌었다. 삼산월드체육관을 가득 메운 홈팬들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았다. 흥국생명 팬들에겐 그녀의 스파이크 하나, 블로킹 하나, 플라잉 디그 하나까지 모든 순간을 가슴 속에 담았다.

일본, 튀르키예, 중국 등 해외 리그에서 오랜 뛰었기에 김연경이 V리그를 소화한 시즌은 딱 8시즌에 불과하다. 김연경이 대단한 것은 그 8시즌 한날한시도 최고가 아닌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김연경이 소화한 8시즌 동안 흥국생명은 모두 챔피언결정전 진출에 성공했다. 그중 챔피언결정전 우승은 네 차례. 그 시리즈의 MVP는 모조리 김연경의 차지였다.
이번 챔프전 MVP도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챔프전 5경기에서 46.31%의 공격 성공률과 133점을 올린 김연경은 기자단 투표 결과 31표를 모두 휩쓸어 만장일치로 챔프전 MVP에 선정됐다. 김연경이 V리그에서 챔프전 MVP에 오른 것은 2008~2009시즌 이후 16시즌 만이다. 오는 14일 열리는 정규리그 시상식에서도 개인 통산 일곱 번째 정규리그 MVP가 확실시되는 김연경이다. 데뷔 시즌에도 정규리그 MVP와 챔피언결정전 MVP, 은퇴 시즌에도 정규리그 MVP와 챔피언결정전. 이처럼 완벽한 ‘수미상관’ 엔딩이 어디 있었을까. 그만큼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변함없는 기량을 유지한 철저한 자기 관리 덕분이었다.


◆ 더 없이 화려했던 V리그 데뷔 초창기
워낙 아마추어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으로 주목받았기에 데뷔 때부터 화제를 모았다. 김연경 드래프트라 불린 2005~2006 신인 드래프트 전체 1순위 지명권을 얻기 위해 2005 V리그 원년 여자부는 ‘꼴찌 올림픽’이 열렸다. GS칼텍스와 흥국생명이 서로 꼴찌를 위해 경쟁했고, 3승13패의 흥국생명이 4승12패의 GS칼텍스를 제치고 전체 1순위 지명권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흥국생명은 당연히 전체 1순위로 김연경의 이름 세 글자를 호명했다. 2005년 10월26일. 전설의 탄생을 알린 날이다. 이후 한국배구연맹(KOVO)는 1순위 지명권을 전년도 성적에 따라 주어지는 방식 대신 전년도 성적에 따른 차등 확률 배부로 방식을 바꿨다.
신인 드래프트 방식을 바꿀 정도로, 김연경은 데뷔 시즌부터 V리그 코트를 초토화시켰다. 데뷔와 동시에 흥국생명의 정규리그 1위 및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이끌며 신인왕과 정규리그, 챔피언결정전 MVP를 싹쓸이했다.
이후에도 거침없었다. 데뷔 2년차였던 2006~2007시즌에도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 MVP는 그녀의 몫이었다. 2007~2009시즌에도 흥국생명을 정규리그 1위로 이끌며 정규리그 MVP는 수상했지만, 챔피언결정전에서 패하며 3연속 정규리그 MVP-챔피언결정전 MVP는 무산됐다. 대신 2008~2009시즌에 정규리그 MVP는 놓쳤지만, 챔피언결정전 MVP를 수상하며 4시즌 간 정규리그 MVP 3회-챔피언결정전 MVP 3회라는 대위업을 달성하며 활동무대를 해외로 옮겼다.

◆ 우승 운이 따르지 않았던 V리그 말년기
일본을 시작으로 튀르키예와 중국에서 뛰며 세계 최고의 아웃사이드 히터로 성장한 김연경은 2012 런던 올림픽에서 대표팀의 ‘4강 신화’ 작성에도 앞장섰다. 클럽 선수로서는 이룰 수 있는 것은 모두 이룬 김연경에게 마지막 남은 것은 올림픽 메달이었다. 2016 리우 올림픽은 8강에서 도전이 멈췄다.
2020 도쿄는 김연경의 마지막 올림픽 도전 무대였다. 코로나19로 1년 미뤄져 2021년에 열렸고, 김연경은 올림픽 준비를 위해 2020~2021시즌을 앞두고 전격 V리그에 컴백한다. 2008~2009시즌 이후 12시즌만의 복귀였다.

아직 전성기 기량을 유지하고 있던 김연경에게 V리그는 너무나 좁았다. 게다가 그해 흥국생명은 내부 FA였던 이재영을 눌러 앉히고, 쌍둥이 자매인 이다영까지 영입해 최강 전력이었다. 승승장구하며 정규리그 1위를 달렸지만, ‘쌍둥이’들의 학폭 의혹이 터지면서 두 선수가 코트에서 사라졌다. 정규리그 1위 자리를 놓친 흥국생명은 플레이오프를 거쳐 챔피언결정전에서 GS칼텍스에게 패했다. 정규리그 MVP는 김연경의 몫이었지만, 우승을 놓친 터라 빛이 바랬다.
2020 도쿄올림픽에서 또 한 번의 4강 신화를 써냈지만, 동메달 결정전에서 패하며 올림픽 메달의 꿈을 놓친 김연경은 V리그를 다시 떠났다. 중국리그에서 1년을 뛴 김연경은 2022~2023시즌에 다시 V리그 돌아왔다. 개막 15연승을 달리며 파죽지세로 달려 나간 현대건설에 밀리는 듯 했다. 그러나 현대건설이 야스민의 부상 여파로 야금야금 승점을 까먹었고, 조용히 따라붙던 흥국생명은 시즌 막판 정규리그 1위 자리를 차지하며 챔피언결정전에 직행했다. 이번에도 김연경에게 기다리고 있는 결말은 ‘새드 엔딩’이었다. 도로공사와의 챔프전에서 1,2차전을 잡고도 3,4,5차전을 내리 내주며 사상 초유의 ‘리버스 스윕’의 희생양이 됐다. 2023~2024시즌엔 시즌 막판 꼴찌 페퍼저축은행에게 덜미를 잡히며 정규리그 1위를 놓쳤고, 플레이오프에서 정관장을 2승1패로 힘겹게 누르고 올라갔다. 그러나 현대건설과의 챔프전에서 체력적인 한계를 실감하며 3경기를 모두 풀세트 접전 끝에 모두 내주는 희대의 패배를 또 당하고 말았다.


◆ 은퇴 선언한 2024~2025시즌, 마침내 챔프전 우승과 함께 영원한 코트의 별이 되어 떠나다
앞선 두 시즌에는 개막 전 ‘어우흥’(어차피 우승은 흥국생명)이라는 수식어를 받을 정도로 우승후보로 손꼽혔으나 챔프전 준우승에 그쳤던 흥국생명. 2024~2025시즌을 앞두고는 ‘어우흥’이라는 평가는 나오지 않았다. 선수단 면면이 대폭 바뀐 데다 외국인 선수도 7순위 막픽으로 뽑은 투트쿠(튀르키예)의 기량이 미덥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뚜껑을 열자 단숨에 평가는 뒤집어졌다. 투트쿠의 기량을 예상 외로 쏠쏠했고, 트레이드로 보강한 세터 이고은과 리베로 신연경이 중심을 단단히 잡아줬다. 여기에 새로운 김연경의 아웃사이드 히터 파트너 정윤주도 갈수록 기량이 쑥쑥 성장했다. V리그 개막 직전 교체한 아시아쿼터 아닐리스 피치(뉴질랜드)도 이동공격과 블로킹으로 코트 가운데를 든든히 지켜줬다.

여기에 김연경은 그야말로 화룡점정이었다. 흥국생명 배구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그녀가 있었기에 투트쿠의 부상 공백으로 흔들리던 시기도 잘 넘길 수 있었다. 개막 14연승에 이어 4라운드부터 다시 11연승을 달리면서 6라운드를 시작하기도 전에 정규리그 1위를 확정지으며 챔피언결정전에 직행했다.
지난 두 시즌 동안 챔프전에 눈물만 흘려야했던 흥국생명.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김연경을 비롯한 주축 선수들이 일찌감치 정규리그 1위를 확정한 덕에 챔프전에 맞추어 푹 쉬며 부상회복과 컨디션 조절을 할 수 있었다.
최상의 몸 상태로 맞이한 상대는 플레이오프를 2승1패로 뚫고 올라온 정관장. 그러나 왼쪽 발목 인대 파열에서 갓 복귀해 성치 않은 몸상태인 부키리치(세르비아), 박은진에 무릎 부상을 안고 뛴 세터 염혜선, 등 근육 손상으로 1차전을 결장해야 했던 주전 리베로 노란까지. 정관장은 부상 병동이었다.
그러나 정관장은 강했다. 흥국생명과 김연경은 1,2차전을 모두 잡고 3차전도 1,2세트를 잡아내며 챔프전 우승에 딱 한 세트를 남겨뒀다. 이후 ‘배수진’을 친 정관장의 집중력이 극한까지 치닫고, 투혼과 정신력으로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는 경지에 다다르면서 흥국생명은 뒷걸음질칠 수밖에 없었다. 3차전을 3,4,5세트를 내리 내주면서 정관장의 기적적인 회생 기회를 준 흥국생명은 4차전마저 풀세트 접전 끝에 패하고 말았다.
시리즈 전체 판도와 분위기를 내준 흥국생명이 5차전에서 믿을 구석은 역시 김연경뿐이었다. 5차전에서 긴연경은 은퇴 직전의 선수라고는 믿을 수 없는 경기력으로 팀을 이끌었다. ‘배구여제’를 넘어 ‘배구의 신’이 강림한 듯 했다. 20년 전 신인 시절의 타점은 구현할 수 없지만, 이를 만회하고도 남을 만한, 상대 블로킹과 수비 위치를 순간적으로 판단해 공격 각도와 코스 를 바꾸는 노련미는 수없이 많은 리그를 돌며 터득한 그녀만의 자산이었다.
정작 그녀에게 우승을 안겨준 것은 그녀가 세계최고의 아웃사이드 히터로 군림할 수 있게 해준 리베로 뺨치는 수비력이었다. 5세트 13-12에서 서브를 넣으며 후위로 빠진 김연경은 결정적인 디그 2개를 걷어 올렸고, 이는 모두 투트쿠의 퀵오픈 득점으로 치환됐다.
2008~2009시즌 이후 무려 16시즌 만에 맛보는 V리그 챔피언결정전 우승이라는 결과와 더 이상 코트에 설 수 없다는 마음까지 겹쳐져 김연경은 승리가 확정된 직후 투트쿠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너무나 처절하고도 슬프고도 아름다운 승리였다.

삼산월드체육관을 가득 메운 ‘철쭉응원단’도 함께 울었다. 더 이상 코트 위에서 호령하며 상대 선수들을 압도하고, 승부처 득점에 성공한 뒤 폭발적인 세리머니로 팬들의 열광을 이끌어내는 ‘배구여제’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이제 더 이상 저 정도 선수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왠지 서글프기도 한 ‘4.8 인천 대첩’이었다.
마지막으로, ‘adiós 김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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