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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79>교토 교류지 '보관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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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11-05 09:31:55 수정 : 2008-11-05 09:3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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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보1호…서기 603년 한국서 건너와
◇한국 국보 제83호 ‘금동 반가사유상’               ◇일본 국보 제1호 ‘보관미륵보살반가사유상’

‘한국의 미소’가 살아있는 우리의 고대 불상 앞에 유럽인들이 몰려들어 찬사를 연발하고 있다고 한다. 벨기에 수도 브뤼셀 중심가의 보자르 예술센터에서는 10월9일부터 ‘한국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다. ‘부처의 미소―1600년 한국 불교예술’이라는 주제로 ‘한국 불교미술 특별전’이 내년 2월까지 이어진다. 우리 불교 미술품 중에서 특히 주목받는 것은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이하 ‘금동반가상’,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다. 바로 이 한국의 ‘금동반가상’과 빼닮은 쌍둥이격 불상이 일본에도 있다. 일본 교토의 고류지(廣隆寺·교토시 우즈마사 지역)에 있는 일본 국보 제1호인 ‘보관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하 ‘보관반가상’)이 그것이다. 이 두 불상은 생김새가 서로 거의 똑같거니와 각기 머리에는 모자인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현재 프랑스 파리에 있는 ‘금동반가상’은 몸체를 청동(靑銅)으로 만들어 금을 입힌 ‘금동’ 불상인 데 비해 일본 고류지의 영보전(靈寶殿)에 있는 ‘보관반가상’은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진 소나무 조각상이다. 일본문화재위원회는 1951년 6월 9일, 이 ‘보관반가상’을 일본 국보 제1호로 정했다.

리쓰메이칸대학 사학과 하야시야 다쓰사브로(林屋辰三郞) 교수는 “고류지에서는 국보 제1호 보관반가상 덕분에 재정이 생겨 먹고살게 됐다”(‘京都’ 1962)고 할 정도로 이 사찰의 주된 수입원이 되고 있다. 현재도 보관반가상을 구경하려면 500엔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일본 고류지 영보전의 ‘보계반가상’


적송으로 만든 보관반가상은 고대 한국에서 왜나라에 보내줬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이 보관반가상이 고대 신라와 백제 중 어느 나라에서 만들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일본의 많은 학자는 “신라에서 건너왔다”고 했다. 그러나 신라가 아닌 “백제에서 건너왔다”고 하는 저명 학자들도 있다. 필자는 그간 수집해온 역사 연구 사료들을 가지고 보다 구체적으로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검토하기로 한다.

우선 신라 도래설이다. 미술사학자 미스자와 스미오(水澤澄夫) 교수는 다음처럼 지적했다. “서기 603년에 아스카의 왜 왕실에서 쇼토쿠태자에게서 보관반가상을 모셔다 교토 고류지를 처음 세운 하타노카와카쓰(秦河勝, 6∼7C)는 신라계 사람이다. 고류지의 미륵상이 신라 양식이라는 것만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수긍이 간다”(‘廣隆寺’ 1975)고 했다. 미술사학자 미즈노 세이치(水野淸一) 교수도 “적송 보관반가상은 신라에서 보내준 것이며, 서울의 덕수궁미술관(일제 치하,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필자 주)에 있는 금동반가상(90㎝)과 똑같다”(‘法隆寺’ 1978)고 밝혔다.

교토대학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도 그의 저서에서 고류지의 적송 보관반가상은 신라 불상이라며 다음과 같이 썼다. “현존하는 미륵반가상의 양식은 신라계의 것이라고 하며, 신라에서 보내준 불상이라는 것을 전해주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歸化人’ 1965)고 했다. 히라노 구니오(平野邦雄) 교수 역시 ‘하타씨 연구’(秦氏の硏究, 1976)에서 신라 불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종래의 신라 도래설에 대해 신라가 아닌 백제에서 보내준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백제 도래설도 아울러 살펴본다. 도쿄대학 건축사학과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 교수와 도쿄교육대학 미술사학과 마치다 고이치(町田甲一) 교수는 공저에서 “보관 미륵보살 반가상(높이 84.3㎝)은 고류지 사찰의 기록에 따르면 스이코천황(推古, 592∼628 재위) 11년(603년)에 백제에서 헌상(獻上)했다고 한다. 하타노카와카쓰는 이 불상을 쇼토쿠태자로부터 물려받아 이 절(고류지)의 전신(前身)인 하치오카데라(蜂岡寺)를 지었다고 한다. 이 불상의 실제 제작은 7세기 후반에 일본에서 만들었다고 생각되나, 그 양식은 한반도에서 전래한 것으로서, 지난날 경성(일제 하의 서울, 필자 주)의 이왕가박물관(당시 서울시청 앞 덕수궁미술관, 필자 주)에 있었던 청동제의 반가상을 극히 닮고 있다”(‘國寶·重要文化財案內’ 1963)고 했다. 

◇두 체의 한국 고대 미륵상을 보유한 일본 고류지 영보전


이처럼 오타 히로타로와 마치다 고이치 교수는 현재 일본 국보 제1호인 적송 보관반가상은 고류지에 전해오는 기록에 따르면 ‘백제에서 헌상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렇게 밝히면서도, 이 글의 뒷부분에 가서는 슬며시 백제가 아닌 ‘일본에서 만들었다고 생각된다’는 등 앞뒤가 맞지 않게 매듭을 지었다. 요컨대 중요한 사실은 고류지의 역사 책에 ‘백제에서 헌상했다’고 하는 대목이다. 고류지에 전해오는 역사 책은 아마도 ‘고류지연기’(廣隆寺緣起)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 사찰에서는 필자가 지난날부터 누차 ‘고류지연기’를 보여줄 것을 요청했으나 응하지 않고 있다.

역시 백제 도래설을 주장하는 고니시 아키오(小西秋雄)씨도 보관반가상은 백제에서 건너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류지에는 귀화인의 자손 하타노카와카쓰가 조선에서 건너온 불상을 쇼토쿠태자에게서 물려받아 603년에 고류지를 세웠다. 이곳 영보전에는 유명한 반가상 두 체가 있다. 그중의 보관반가상은 적송을 재료로 만든 반가상으로서 백제 말기에 백제로부터 일본으로 전래한 불상이라는 게 거의 확정적이다”(‘廣隆寺の彌勒菩薩’ 1962)고 했다.

고니시 아키오씨가 밝힌 것처럼 고류지의 영보전에는 또 한 체의 일본 국보인 머리에 상투를 튼 모습의 ‘보계반가상’도 모셔 있다. 이 보계 반가상에 대해 오타 히로타로 교수와 마치다 고이치 교수는 신라에서 건너왔다고 했다. 즉 ‘보계반가상’(불상 높이 66.4㎝, 녹나무 한 둥치로 조각함)은 앞의 상과 똑같은 형식의 것으로서, ‘사전(寺傳)’에서는 신라에서 헌상했다고 한다. 보계를 드높게 틀어올렸기 때문에 머리에 관을 쓰지 못한 데서 앞의 상과 구별하여 ‘보계미륵’ 또는 그 용모로서 ‘우는 미륵’(泣き彌勒)으로 속칭하고 있다. 천의(天衣)는 가죽제로서 특이한 예이다”고 했다.

고니시 아키오씨 역시 다음처럼 보계반가상의 신라 도래설을 주장하고 있다. “현재 ‘우는 불상’이라고도 불리는 것이 ‘보계 미륵보살 반가상’이다. ‘일본서기’에 기록돼 있듯이, 스이코 31년(623) 신라에서 대사인 나말지선이(奈末智洗爾)를 일본에 보내와 헌상했다고 하는 불상으로 이 불상의 재료는 녹나무이다.”

이처럼 고대 한국에서 전래한 반가상은 만든 곳이 각기 백제와 신라로 상반된다. 특히 주목할 것은 13세기 후반에 일왕이 직접 썼다는 다음과 같은 역사 기록이다. 616년인 “스이코여왕 24년 5월3일, 여왕이 병환으로 쓰러지자 쇼토쿠태자는 여러 곳에 가람을 세우도록 서원(誓願)하였으며, 성체(聖體)와 똑같은 불상을 소원하자 그해 7월에 신라왕(진평왕, 필자 주)이 금불상을 보내주었다. 높이 2척이며 하치오카데라에 안치했다”(今上皇帝 ‘一代要記’ 1278∼1287)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서기 616년 7월에 신라왕이 보내주었다고 하는 ‘금불상’은 고류지 영보전에 있는 일본 국보가 된 두 체의 고대 한국 반가상(금불상)들 중에서 어느 쪽의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일찍이 저명한 불교미술 사학자 미나모토 도요무네(源豊宗) 교수도 두 반가상에 관해 일제 말기에 쓴 저서에서 국적은 지정하지 않은 채, “두 미륵상(보관반가상 및 보계반가상)은 스이코 시대(592∼628)에 조선에서 건너온 나무 조각상이다”(‘古美術見學’ 1944)라고만 단정했다. 금불상이라는 것은 나무 불상에다 도금한 것을 금동불상으로 오해했던 것.

문헌 제시를 마다하는 현재의 고류지에서는 두 반가상의 국적에 대해 과연 무엇이라고 주장하고 있는가. 고류지에서 직접 편집해서 팔고 있는 책자(‘廣隆寺’ 제작 便利堂. 발행연도의 표시도 안 함, 500엔으로 판매 중)에서는 ‘보관반가상’에 대해서는 국적 표시 없이 그저 ‘국보1호’만 크게 내세우고 있다. 반면에 ‘보계반가상’에 관해서만은 사진(14×23㎝)과 함께 “백제에서 갖다 바쳤다”고 다음처럼 쓰고 있다.

“(국보)―백제국에서 온 공헌불(貢獻佛)로서, 앞의 미륵상(국보 제1호 보관반가상, 필자 주)과 똑같은 아스카시대(592∼628, 필자 주)에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불상은 눈이 크고 가늘고 길게 덮이는 눈이며, 입술을 당기고 있어서 울상처럼 보여 ‘우는 미륵’으로도 불린다.

이 불상도 또한 손발과 의상 등의 조법(彫法)이 뛰어나며 안정감 넘치는 빼어난 기교를 보이고 균제미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책자에서 국보 제1호를 밝히는 또 하나의 적송 보관반가상은 책 전면의 큰 사진(18×23㎝)을 내고, 일본의 ‘국보 1호’라는 것만 자랑할 뿐이다. 어떤 이유인지 이 적송 보관반가상이 백제나 신라 그 어느 쪽에서 건너왔다는 출처에 관한 언급은 없다.

두 반가상의 국적에 관한 기록이 엄연히 고류지 역사책에 있는데도 요즘 고류지에서 직접 편집해서 팔고 있는 책자에서는 적송 보관반가상에 대해서만은 전혀 백제나 신라 등 국적 표시 없이 그저 ‘국보 1호’만 크게 내세우고 있다. 오타 히로타로 교수 등이 “보계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사전’(寺傳)에서 신라에서 헌상했다고 한다”고 했으나, 현재의 고류지 발행 책자에서는 “백제국의 공헌불”이라고 내세우니 옛날 ‘고류지연기’라는 사전을 사찰 관계자가 잘못 읽었다는 것인가.

그것은 차치하고라도 모든 일본 학자들이 두 불상은 각기 한반도에서 보내왔다는데 어째서 적송 ‘보관반가상’에 대해 ‘국보 제1호’만 내세우며 백제나 신라 도래 표시는 뒷전으로 미루고 있는지 차제에 고류지 관계자들에게 굳이 묻고 싶다.

하기는 일본의 저명한 교토 향토사학자 다나카 시게히사(田中重久)씨가 그의 저서(‘彌勒菩薩の指’ 1960)에서 고류지는 “조선인의 절, 우즈마사의 고류지”라고 지적하면서, “조선의 불상이 분명한 것까지도 아스카시대에 만든 것이 돼버리고 만다”고 비판할 정도이기도 하다. 독일의 신칸트파 철학자였던 빌헬름 빈델반트(Wilhelm Windelbant, 1848∼1915)는 “역사는 과학이다”라고 주창했다. 역사의 고증은 결코 누구도 숨길 수 없는 일이다.

 

한국외국어대 교수

senshy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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