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통해서 본 다양한 얼굴들
미술이 변화하고 있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초현실주의라는 말조차 무색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작가들은 작업 과정에서 디지털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면서 선배작가들이 누리지 못했던 창작의 나래를 무한대로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소재나 기법도 자연스레 파격적이다. 전시공간도 미술관 안팎을 넘나든다. ‘너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냐는 일부의 비판도 있지만 당대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흐름임이 분명하다. 화폭과 화법이 풍성해지면서 메시지도 깊고 다양한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 몇몇 전시들을 통해서도 이를 가늠해 볼 수 있다.
|
◇김남표의 ‘풍경’ |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내년 2월13일까지 열리는 ‘미래의 기억들’전을 우선 살펴보자, 한국작가 6명과 외국작가 5명이 참여한 전시는 리움의 외관과 카페, 바닥 등에 설치된 장소 특정적인 작품들이 상당수 눈에 띈다.
프랑스 작가 로랑 그라소는 현대미술전시실인 뮤지엄2의 외벽에 알파벳 19개로 이뤄진 네온 작업을 설치했다. 전시장 옥상에 설치된 루이스 부르주아의 거대 거미조각 ‘마망’과 미술관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과거의 어느 곳, 또는 미래의 어느 지점에 와 있는 기분좋은 착각에 빠져들게 된다.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Memories of the Future’를 떠올리게 해준다.
|
◇지용호의 ‘버팔로’ |
카페 벽면과 강당 옆 바닥에는 대만 작가 마이클 린이 대만에서 이불 홑청 등에 자주 쓰이는 알록달록한 꽃 패턴을 그린 작품이 자리하고 있다. ‘익숙한 과거’ 같지만 장소성으로 인해 ‘오래된 미래’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02)2014-6901
9월12일까지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2인전을 여는 김남표와 지용호의 작업도 눈여겨 볼 만하다. 초현실적 풍경 회화의 김남표 작업에선 인조털을 이용한 오브제가 얹혀진다. 실타래같이 이야기들이 풀려나오는 일종의 장치다. 자주 등장하는 얼룩말은 동양화적인 필선의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동차, 핸드백, 굽높은 힐 등은 한 화폭에 어우러져 풍경이 된다. 그릇에 힐이 놓이기도 한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물들이 기능성은 제거되고 풍경으로 환원되고 있는 셈이다.
|
◇한계륜의 영상작품 ‘From right to left’ |
검은 폐타이어를 이용해 조각하는 지용호의 작업에선 힘이 느껴진다. 최근 들어 동물들의 이미지는 현실적 강인함을 넘어서면서 초현실주의적으로 흐르고 있다. 가상 체험이 일상화된 젊은 작가들에서 보여지는 특징이다. 그는 최근 색이 들어간 작업을 선보였다. 흰색과 붉은색, 노란색 등 다양한 색깔의 타이어를 이용해 만든 뮤턴트(돌연변이) 시리즈와 색을 넣은 지점토 작업이다. 회화적 느낌으로 조각을 해 본 것이다. 강한 힘이 느껴지는 조각에서 그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엄중하다. “진실마저도 힘과 권력함수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변주되는 ‘개 같은 현실’을 형상화하고 싶었어요.” (02)720-1020
|
◇프랑스 작가 로랑 그라소의 ‘기억들’ |
소격동 학고재 갤러리에서 9월1일부터 10월31일까지 열리는 ‘춘추’ 전은 현대작가 11명과 한국 고미술 12점을 짝지워 한국 현대미술이 어디에 본류가 있는지, 현대미술에 면면히 흐르는 한국미술의 정체성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자리다. 이 전시에선 한계륜의 작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차고 이지러지는 달빛을 받으며 밤바다 위로 미끄러지듯이 흘러가는 배 모습을 담은 한계륜의 영상 작업에서는 조선후기 세도관료 황산 김유근(1785∼1840)이 먼 산을 바라보며 배를 타는 강태공의 모습을 그린 ‘소림단학도’ 속 은일의 정서가 느껴진다. 시대를 넘어선 소통이다. 디지털 환경이 가져다 준 선물이라 할 수 있다. (02)720-1524
편완식 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