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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37> 당신의 감정은 안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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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8-29 01:08:29 수정 : 2011-08-29 01: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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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영역이던 감 정…노동시장서 상 품으로 탄생
환한 미소·믿음직한 표정…‘감정 노동’ 강요당해
개인, 감정 기계로 전락할 수도
사람은 호모 센티멘털리스(homo sentimentalis), 즉 감정 동물이다. 감정은 주체 내부에 작동하는 에너지의 흐름이고, 타자와의 유대와 접속의 매개 노릇을 하는 그 무엇이다.

“감정은 온전한 의미의 행동은 아니다. 그러나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내적인 에너지, 행동에 특별한 ‘기분’ 또는 ‘색조’를 부여하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감정이란 행동의 한 측면, 곧 ‘에너지가 실린’ 측면으로 정의될 수 있다.”(에바 일루즈, ‘감정 자본주의’)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감정이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의 감정의 실체를 잘 알아야 한다. “감정[은] 내 영혼의 각축장이다. 자신의 감정을 알지 못하면 인격을 영혼에 일치시키지 못한다.”(게리 주커브·린다 프란시스, ‘감정을 과학한다’) 감정은 주체의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안에는 너무나도 많은 사회와 문화들을 품고 있는 에너지다. 감정은 끊임없이 진화한다. 아울러 감정은 사회적 제약들 속에서 새로운 형태로 변화한다. 즉 감정의 상품화, 혹은 감정의 자본화가 바로 그것이다.

현대사회는 감정의 자본화가 심각하다. 대표적으로 서비스직군 종사자들의 감정 노동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정과 연기하는 감정 사이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감정은 육체의 장기들과도 밀접히 연관돼 있다. 고통의 감정은 명치 부근을 뻐근하게 만들고 심장에는 무언가 날카로운 것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수반한다.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아주 격한 슬픔에 빠진다. 그 격한 슬픈 감정은 몸에 어떤 변화를 불러오는가? 슬픔이 너무나 클 때 심장이 찢기는 통증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자기의 감정을 잘 알기 위해서는 에너지의 흐름이 어떤가를 살피고, 몸의 감각에 집중해야만 한다. 분노라는 감정은 세계와 내 안에 있는 충동과 의지의 불일치에서 비롯한다.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분노한다. 분노는 나 이외의 것들, 타자와 세계에 대한 거부의 감정이다. 아울러 분노는 자기의 뜻대로 할 수 없는 일들, 사람들, 사회에 대한 절망과 무력감의 다른 표현이다. 분노는 그것이 타자를 향할 때조차 무력한 자기 자신을 향한 소극적 공격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는 분노를 낳게 만든 대상뿐만 아니라 자기를 다치게 한다. 그것이 고착될 때 사람들은 스스로를 타자나 세계와의 소통이 단절된 상태 속에 유폐해버린다. 그들은 언제나 사회의 그늘 속에 웅크린 채 시간을 흘려보낸다.

일찍이 이 감정을 주목한 것은 ‘자본’이다. ‘자본’은 노동 시장에서 감정을 매력적인 상품으로 가공한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직업군에서 친절을 강요당한다. 소비자들과 직접 대면하는 업종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흔히 소비자를 대하는 기본 요령으로 환한 미소와 친절한 응대를 하도록 훈련된다. 이렇듯 우리의 일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감정 노동’이다. 감정 노동에서 주체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다른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해 가라앉은 감정은 억지로라도 끌어올려야 하고, 상대가 화를 돋우는 행동을 하더라도 자신의 감정은 억눌러야 한다. 감정 노동은 눈에 안 보이는 가공된 감정이란 화폐를 타자에게 지불하는 행위다.

“우리는 모두 부분적으로 항공 승무원이라고 볼 수 있다. 자기 회사를 ‘유쾌하고 신뢰할 수 있는’ 곳으로 보이게 하고 자신의 상사가 ‘활기에 넘치시는 분’으로 보일 수 있게 사무실 분위기를 명랑하게 만드는 비서, ‘즐거운 식사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웨이트리스나 웨이터, 고객들이 환영받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여행 가이드나 호텔 데스크의 직원, 고객들이 스스로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도록 염려하는 마음을 담은 눈길을 건네는 사회복지사, ‘잘 나가는 제품’이라는 확신을 주는 영업사원, 보고 있으면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추심원, 유족들의 심정을 잘 이해해준다는 느낌을 주는 장의사, 사람들로 하여금 포근하다는 느낌과 공평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목사 등. 이런 사람들도 모두 어떤 식으로든 감정 노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앨리 러셀 혹실드, ‘감정 노동’)

사회학자인 앨리 러셀 혹실드는 감정이 시장에서 자본으로 떠오르는 현상을 주목하고 그 의미를 따지면서 처음으로 ‘감정 노동’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쓴다. 감정 노동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정과 연기하는 감정 사이에 혼란을 만들어 우리를 감정-기계로 전락시킬 수 있다. 자본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 감정을 착취하는 셈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감정은 개인의 것이고 사적인 영역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공적 영역은 몰감정적이고 사적 영역은 감정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가족 내부는 감정으로 가득 차 있는 자아들이 출현하는 감정들의 권역인 데 반해, 회사는 사적 감정을 가진 자아를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몰감정의 공적 권역이다. 가족 내부는 남자와 여자의 역할과 정체성이 재생산되는 권역이고, 남자와 여자는 감정들이 위계적으로 조직되는 방식에 따라 길러진다. 어른들은 남자 아이가 함부로 울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남자는 씩씩해야 하고,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용기와 합리성의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울면 지는 것이다. 남자 아이는 강한 전사로 거듭나기 위해서 ‘사적 감정’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반면에 여자는 고분고분해야 하고, 남을 배려해야 하고, 이질적인 것들을 보듬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훈육된다. 여자는 전사가 아니라 전사의 조력자이기 때문이다. 남자 아이가 몽니를 부려도 남자다움으로 받아들이지만 뻘때추니는 여자답지 못하다고 타박맞기가 십상이다. 가족 내부에서 남자에게 감정의 자제를 남성적 이상의 실천으로 떠받들거나 여자에게 조신함을 가르치는 것은 “감정들은 위계적인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고, 이렇게 조직된 감정의 위계는 암묵적인 방식으로 도덕적·사회적 배치를 조직”(에바 일루즈, 앞의 책)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또한 자본주의는 감정을 배제한 합리성과 공적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가부장제 체제고, 반면에 여성 영역은 사적 감정이 들끓는 정서의 영역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런 관습적 분할의 경계선이 흐릿해진 자리에 ‘감정 자본주의’가 양생되는 것이다. 에바 일루즈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간의 경계가 사라지는 현상을 눈여겨본다. 그리하여 ‘감정 자본주의’가 감정이 경제 영역에서 중요한 가치로 떠오르고, 또 경제 법칙들이 감정 영역으로 밀려 들어와 핵심적 원리가 되는 현상임을 말한다. 감정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한편으로는 경제적 자아를 감정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들은 도구적 행위로 포섭한다. 한마디로 감정이 곧 능력이고 자본이 되는 사회로 바뀐 것이다. 감정은 더 이상 사적 영역에만 머물러 있지 못한다. ‘자본’은 감정이 그 내부에 문화 의미들과 사회관계들을 함축하고 있는 에너지라는 걸 눈치채고, 그것을 잘 활용한다면 자본의 이익을 늘리는 데 효율적인 수단이 될 수 있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감정은 사회 이전(pre-social) 문화 이전(pre-cutural)의 어떤 것이 아니라, 극도로 압축되어 있는 문화 의미들과 사회관계들 바로 그것이다. 감정이 행동에 에너지를 불어넣을 수 있는 이유는 이렇게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감정은 어떻게 이러한 ‘에너지’를 보유할 수 있을까? 그것은 감정이 언제나 자아의 감정이요, 자아와 타자들(문화적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는 타자들)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감정이기 때문이다.”(에바 일루즈, 앞의 책)

‘자본’은 경제 영역에서 감정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 그 방법을 찾아냈다. 즉 감정을 생산성 향상의 도구로 썼던 것이다. 본디 감정의 권역으로 이해되었던 가족 내부에서도 감정의 쓰임은 예전과는 달라진다. 즉 감정이 가족 내부에서 합리화의 매개가 되었던 것이다.

탈현대 사회에서 국가, 인터넷 테크놀로지, 심리학에 속하는 여러 담론들이 자아를 주된 타깃으로 삼는다. 사적인 자아들은 이런 제도들에 의해 포획되고, 제도들과 자아들이 얽히고 스미며 “시장 레퍼토리들과 자아 언어들”이 한 몸통이 되는 사태에 이른다. 자아와 감정들은 범주화하고 계량화되면서 사고파는 사물로 변질한다. 감정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신의 감정은 당신의 것만은 아니다. 아울러 감정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사적 관계들에서 ‘육체’를 빼버리고, 사랑의 관계에서도 ‘낭만’을 배제한다. 대신에 그 빈자리를 ‘차가운 친밀성’이 채운다. 좋은 예가 인터넷 사이트 안에서의 관계들이다. 인터넷 안에서 자아는 쉽게 공적인 그 무엇으로 탈바꿈한다. “인터넷은 공적인 감정적 자아를 전제·구현하는 테크놀로지요, 나아가 공적인 감정적 자아로 하여금 사적인 상호작용에 선행하게 하고 사적인 상호작용을 구성하게 하는 테크놀로지”(에바 일루즈, 앞의 책)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좋든 싫든 우리는 감정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삶을 꾸릴 수밖에 없다. 이는 ‘나’의 감정과 정체성이 공적인 경제 영역과 상호삼투하면서 점점 더 공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뜻이다. 오늘 자본의 압력 아래서 도구화·상품화로 일그러진 당신의 감정은 안녕한가?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에바 일루즈, ‘감정 자본주의’, 김정아 옮김, 돌베개, 2010
●앨리 러셀 혹실드, ‘감정 노동’, 이가람 옮김, 이매진, 2009
●게리 주커브·린다 프란시스, ‘감정을 과학한다’, 윤규상 옮김, 이레,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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