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본.다' 연출가 최진아 |
국립극단 ‘젊은 연출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연극 ‘본.다’의 작가 겸 연출가 최진아씨를 만나 숨겨진 연극 속 이야기를 듣고 왔다. 인터뷰 중간 함께 작업하는 배우들이 건너 테이블에 있는 걸 뒤늦게 발견하자 ‘듣지 마. 저리로 가’라는 귀여운 앙탈을 부려 웃음을 자아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 ‘본.다’는 무엇을 보여주는 연극 아님
오는 30일부터 국립극단 내 소극장 판 무대에 오르는 이번 작품은 8명의 배우가 ‘본다’는 행위를 총 14개의 에피소드로 풀어내는 극이다. 국립극단과 극단 놀땅의 공동제작 작품이다.
최 연출은 ‘본.다’는 “‘본다’는 행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연극이다”고 말했다.
“제목이 ‘본다’여서 그런지 무엇을 보여주는 작품이냐?에 대한 질문이 많았어요. 오히려 이 작품은 본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연극이에요. 막상 연극을 관람하면, ‘왜 이렇게 말이 많지?’ 라는 질문도 나올 수 있을 듯해요. ‘보고 있다’라는 현재 상태로만 연극을 만들고 싶었죠. 무엇, 혹은 왜 라는 주어나 목적어를 빼고 본다는 행위를 중시하고 있거든요. ”
연극 '본.다' 연습장면을 지켜보는 연출가 최진아 |
사실, 이 작품의 보도자료를 먼저 접하고 상당히 난감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까지 명쾌하게 핵심을 짚어주는 국립극단의 보도자료를 받아왔던 지라 핵심이 잘 잡히지 않는 '본.다' 보도자료를 받고 ‘도대체 이 작품의 정체는 뭐지’ 란 호기심이 생겨나기도 했다. 최 연출은 ‘두 부류의 관객반응이 나올 것 같다’는 말로 작품의 분위기를 암시했다.
“전체를 통찰해서 보는 관객은 신선하게 받아들일 듯 해요. 반대로 개별 에피소드의 부분 부분에 집중하는 관객들은 어려워할 수도 있을 것 같내요. 육하원칙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동사 ‘본다’ 하나만 제시하니 당황하게 되는 거죠.”
독창적인 사유로 관객의 머리를 기분 좋게 통통 때려주는 연출가인 최진아는 이번에도 뭔가 제대로 일을 낸 듯 싶다. 이번엔 ‘본.다’에 관한 토론, ‘인디언의 눈’에 관한 토론도 에피소드로 담겨있다.
“무엇을 볼 때의 의미나 느낌이 아닌 단순히 눈으로 무엇을 보는 것에 대한, 눈의 망막에 맺힌 상에 대한 시감각만으로 연극을 만드는 것에 대해 토론을 벌여요. 쉽게 말해 보고 있는 장면, 못 보는 장면, 보고 싶은 장면, 감추고 싶은 장면 등을 계속 끌고 오는 거죠. 어떻게 보면 말이 안 될 수도 있을 거에요. 연극은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본.다’는 이야기가 아닌 거죠. ”
■ 내 주변을 낯설게 바라보기
이야기를 들을수록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뭔가가 눈 앞에서 그려졌다. 최 연출은 “배우들의 창의력에 기대는 게 많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는 희곡에 통으로 의지했다면 이번엔 배우들 스스로 만들어가는 장면이 많아요. 희곡의 주제나 장면이 글 속에서 미리 만들어져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극적인 사건들이나 캐릭터도 없구요. 극 초반에 동네 골목에 앉아 있는 할머니가 어딘가를 멍하게 바라보는 에피소드가 나와요. 보고 싶은 욕구라는 의미도 될 수도 있는데, 이 장면이 모티브가 돼 이 연극을 만들게 됐어요. ”
연극 '본.다' 배우들. 장성익, 김수진, 최영도, 이준영, 주인영,김유리, 권령은, 이승주 |
최 연출은 “시 감각에 대한 연극이므로 최대한 시각을 자극할 수 있는 장면들을 찾아낼 것”이라고 밝혔다. 대화하는 에피소드, 춤추는 에피소드, 실업자들 여섯이 뛰는 에피소드, 보여지는 것의 불편함에 관한 에피소드, 공간을 움직이는 에피소드등으로 이어져 시지각에 대한 명상서로 보기에도 손색없다.
한편, ‘본다’라는 시감각을 낯설게 바라볼 것을 이야기하는 작픔으로도 보인다. 어쩌면 제일 현혹되기 쉬운 눈이 가장 부정확한 경우도 많다. 보면서 이미 규정하고, 죄책감을 느끼듯 각자 언어와 편견의 작용을 받는 게 ‘본다’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번 ‘본.다’에서 화두는 몇 시간이고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 시감각의 즐거움, 그리고 보는 대상에 대한 아무런 가치판단 없이 본질로 향해가는 시선의 통찰력이에요.”
■ 숨겨진 이야기들을 연극 무대로 불러오는 연출가
대학에서 연극 동아리 활동을 하다 동국대 대학원 연극영화과로 전공을 바꾼 최진아는 연우무대에서 배우로 먼저 얼굴을 알렸다. 이 후 ‘연애얘기아님’이란 작품을 직접 극작한 뒤 연출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2006년 선보인 ‘사랑,지고지순하다’는 연극평론가가 뽑은 올해의 한국연극베스트3에 선정되기도 했다. 2010년 올린 ‘1동 28번지 차숙이네’로 대산문학상희곡상, 대한민국연극대상 올해의연극베스트7, 동아연극상작품상 수상 외에도 동경아트마켓에 공식참가 하며 연출가로 이름을 알렸다.
“배우로서는 캐스팅이 잘 안 됐어요.(웃음) 2004년 극단 ‘놀땅’을 창단해 작가 겸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죠. 작가는 명확히 모를지라도 안으로 파고드는 힘이 강해야 해요. 반면에 연출가는 목표가 정확해야 하고 구체적이어야 돼요. 외향적인 거죠. 연출가는 말이라는 도구를 잘 이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말하면서 소통 해나가는 직업 같아요.”
최진아 연출가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다니는 관객 혹은 작가이기도 하다. 매끈하게 잘 만들어져서 인간적인 냄새가 풍기지 않는 유명 연극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품고 있다. 흔히 평론에서 말하는 연극 미학을 구축하기 보다는 관객에게 보다 인간적인 말을 건네는 것도 특징.
“연극을 보러 오는 관객은 뭔가를 찾으러 다니는 사람 같아요. 살다보면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있잖아요. 볼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에 일부러 불편한 소극장을 찾으러 온다는 건 분명 감동이 있기 때문 아닐까요. 사람에게 사람이 필요하듯, 연극이 필요한 거 같아요. 삶에 대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 꼭 연극이 필요하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그게 연극이면 좋겠어요. 인간이 정말 긴밀히 접촉하는 장이잖아요. ”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숨겨진 이야기를 연극무대로 불러내는 연출가 최진아에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듣고 만져보게 한 뒤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분명 있다. 추후 오랜 시간 함께한 친구이자 작가인 김민정이 쓴 연극 ‘푸른 곰팡이’를 선돌극장에서 올린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본.다’를 본 뒤 객석에 앉아있을 자신에게 나쁜 말이든 좋은 말이든 코멘트를 남겨 달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한편의 연극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무엇을 논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심이 많은 연출가다운 발언이었다.
공연칼럼니스트 정다훈(ekgns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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