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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손 이구, 눈물 지으며 국사당 복원 유언”

입력 : 2013-12-01 20:38:11 수정 : 2013-12-01 23:4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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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자 여사 조카 뻘 나시모토 인터뷰 “전하께서 돌아가시기 10여년쯤 전에 서울 인왕산 국사당(國師堂)을 함께 둘러봤어요.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볼 게 하나도 없더군요. 전하께선 눈물을 흘리시며 ‘이래선 안 된다. 국사당을 빨리 남산의 옛 자리로 옮겨 원형대로 되살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을 마친 나시모토 다카오(梨本隆夫·75)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기념재단 대표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가 ‘전하’라고 부른 이는 이구(李玖·1931∼2005) 전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명예총재다.

이 전 총재는 조선 26대 황제 고종의 넷째 아들 영친왕(英親王·1897∼1970)과 일왕가의 친척인 나시모토노미야 가문의 딸 이방자(李方子·1901∼1989) 여사 사이에 태어난 조선의 황손이다. 일본 야마가타(山形)현 출신으로 일찍이 나시모토노미야 가문의 양자로 입양된 나시모토 대표는 한·일 우호를 목표로 나시모토노미야기념재단을 세워 이 전 총재가 타계할 때까지 그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 이 여사와 이 전 총재는 나시모토 대표한테 각각 고모, 사촌 뻘이다.

나시모토 다카오씨는 “일제강점기 조선신궁에 밀려 남산에서 인왕산으로 옮겨진 국사당을 원래 자리에 복원하면 한국의 국운이 융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총재가 그토록 안타까워했다는 국사당은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가 남산에 지은 건물이다. 남산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받들어 왕조와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다지려는 뜻이 담겼다. 하지만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국사당은 수난을 면치 못한다. 1920년대 일제는 남산에 있던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내몰고, 그 자리에 ‘조선신궁’을 지었다.

“신궁은 일왕가의 조상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이끈 메이지 국왕 둘만 모시고 조선의 민속신앙은 내팽개쳤습니다. 당시 한민족을 상징하는 단군(檀君)도 함께 모셔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으나 거부당했죠. 조선의 운세를 완전히 꺾으려 한 겁니다. 저희 재단은 전하의 뜻을 받들어 국사당을 남산의 원래 자리로 옮겨 복원하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성사가 되면 한국의 국운이 융성하고 한·일 관계도 훨씬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이 전 총재가 미국 명문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나시모토 대표는 “건축사 자격증을 가진 전하께선 새로운 국사당을 직접 설계하고 짓는 꿈을 꾸셨다”며 “생전에 국사당 복원이 이뤄지지 않아 결국 유언으로 남고 말았다”고 말했다. 2005년 7월16일 도쿄 한 호텔에서 숨진 이 전 총재의 유해는 국내로 운구돼 경기 남양주 영친왕 묘역 곁에 묻혔다. 나시모토 대표는 “전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단둘이 만나 국사당 복원을 비롯해 많은 얘기를 나눴다”고 회상했다.

나시모토 대표는 최근 한·일 관계 악화를 염려해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부인 아키에 여사 측에 “한국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뜻을 전달하기도 했다. 국사당 복원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한·일 친선의 복원이라는 게 나시모토 대표의 지론이다.

“과거 일제가 조선에 한 나쁜 짓 가운데 단군신화의 성지인 강화도 마니산의 우물을 막아버린 게 있습니다. 물 흐름을 차단해 한민족의 맥을 아예 끊어버리려는 의도였죠. 한국의 민족정기 회복 차원에서 국사당 복원은 물론 마니산 우물을 되살리는 일도 시급합니다.”

글=김태훈, 사진=남정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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