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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조국 지키려다 산화…기록 없이 역사 뒤안길로

입력 : 2014-06-25 06:00:00 수정 : 2014-06-25 07:2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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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영웅’ 화교 참전용사들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외국인 묘역에는 두 용사의 묘가 조용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중국인 강혜림(姜惠霖·장후이린)과 위서방(魏緖舫·웨이쉬팡)의 묘다. 두 사람은 6·25전쟁에 참전해 태극기 아래에서 함께 싸운 국내 거주 화교(華僑) 용사다. 6·25전쟁에 중국군(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한 것은 알아도 화교가 우리를 도왔다는 사실은 6·25전쟁에 대한 기억만큼이나 아득하다. 강혜림은 1951년 2월 적정 정찰 등의 임무를 수행 중 경기도 과천에서 전사했다. 유해는 부산화교소학교에 임시로 안장됐다가 1964년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졌다.

위서방은 1950년 10월 1사단 수색대에 입대해 적진정찰 및 중공군 포로 신문 활동의 공로가 있다. 휴전 후 한의사로 극빈환자 무료 진료 등을 하다 1989년 사망한 뒤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이곳에 안장됐다. 두 사람의 묘는 원래 따로 있다가 2012년 5월15일 강혜림의 묘를 위서방의 묘 옆으로 이장하면서 외국인 묘역이 조성됐다. 전우가 혼령으로 다시 만난 셈이다.

‘또 하나의 조국’인 대한민국을 위해 청춘은 불살랐던 청춘들은 이제 제대로 된 기록도 남기지 못하고 역사의 뒤편으로 쓸쓸히 사라졌다. 화교 용사의 참전은 중국군의 6·25전쟁 개입과 역사적 궤를 같이한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후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국군과 유엔군이 그해 10월 중국군 개입으로 퇴각하던 시점에 화교 참전이 이루어진다. 중국군이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에 대항하고 북한을 돕는다)의 기치를 들고 개입했다면 화교 참전 용사들은 ‘제2의 조국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참전했다고 한다.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외국인 묘역에 안치된 6·25전쟁 화교 참전 용사 강혜림(중국명 장후이린·왼쪽)과 위서방(웨이쉬팡)의 묘. 두 용사의 묘는 원래 따로 있다가 2012년 5월15일 강혜림의 묘를 위서방의 묘 옆으로 이장해 외국인 묘역이 조성되면서 전우가 혼령으로 다시 만났다.
김범준 기자
육군 4863부대 SC지대(支隊)는 대표적인 화교 참전부대다. 여한(旅韓·재한)화교참전동지회 약사(略史)에 따르면 1951년 1월 200명 규모로 육군 4863부대 SC지대가 결성된다. SC지대라는 부대명은 서울 차이니즈(Seoul Chinese)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총책임자 왕스유(王世有), 훈련대장 류궈화(劉國華), 지대장 나아통(羅亞通·뤄야퉁)이었다. 이 중 왕스유와 류궈화는 국내 거주 화교가 아니라 중화민국(대만) 정부가 파견한 국부군(國府軍) 장교 출신이다. 중화민국 정부는 6·25전쟁이 나자 참전을 원했으나 당시 국제 정세상 여의치 않자 비공식적으로 국부군 장교를 파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교부대는 경기도 문산과 서울 사직공원에서 10주간의 각종 훈련을 마친 뒤 본부를 강화도 부근 교동도에 두고 적 후방에 대한 첩보공작 활동 및 특수작전을 수행했다.

이들의 활동기간은 1951년 3월부터 53년9월까지 2년 반 동안이었다. 한성화교협회회장을 지낸 친위광(秦裕光·진유광) 전 중화민국한국연구학회장은 1979년 한 일간지 연재에서 SC지대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다. “대원들은 12명 단위로 조를 편성해 전방 HID(육군첩보부대)에 분산배치했다. 이들의 임무는 적 후방에 들어가 군사정보를 수집하는 것으로 육해공 모든 루트를 이용했다. 황해도 연백·해주 지역과 철원·김화·평강지역의 적 후방침투작전, 평남 성천·순천 지역의 공중투하작전을 비롯해 함남 함흥 북방의 해상침투에 의한 정보활동 등 북녘 전역을 누비며 종횡무진 활약했다.” 

국내 화교 참전 부대인 육군 4863부대 SC지대의 부대원인 김성정(중국명 진성팅·왼쪽)씨와 사촌 동생 김정의(진팅이)씨가 6·25전쟁 당시 소총을 들고 있는 빛 바랜 흑백사진. 김성정씨는 SC지대원으로 활약한 공로로 1973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국포장을 받았으며 2001년 사망했다. 김정의씨는 6·25전쟁 당시 공작활동을 위해 낙하산을 타고 적 후방에 침투한 뒤 실종돼 돌아오지 못했다.
여한화교참전동지회승계회 제공
200명의 대원 중 무장공작대원은 한국어와 중국어에 능통해 중국군을 만나면 북한군 행세를, 북한군을 만나면 중국군 행세를 하며 중국군의 인원, 장비, 부대위치, 편성 등의 첩보를 수집하고 정보가 될 만한 중국군 간부 납치, 주요시설 파괴 공작도 수행했다. 이 사이 희생자도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53년 9월 SC지대가 해체됐을 때 무장공작대원 70여명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20여명뿐이었다고 한다. 친위광 전 회장은 이에 대해 “동란으로 희생된 무수한 한국인들에 비하면 얼마 안 되는 수였지만 200명의 참전 화교로선 너무나 큰 희생이었다”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적었다.

부대 해체 후 뿔뿔이 흩어져 일부는 중국군 포로 설득작업, 대북 방송의 중국어 아나운서, 심리전 요원으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거의 생업에 종사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이들에게 위로금 같은 보상은 주어지지 않았다. 1971년 12월 53명이 종군기장을, 1975년 9월 10명이 보국포장을 받은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60여년의 성상(星霜)이 흐르며 대부분의 국내 거주 화교 참전자들은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화교단체 관계자는 “미국으로 건너간 화교 참전자 중 3∼4명 생존했을 것으로 보이나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 “충혼위령탑에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참전용사를 생각하면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청중·김선영 기자 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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