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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 곳곳에 아로 새겨진 청나라 280년 명멸의 역사

입력 : 2014-09-13 02:00:28 수정 : 2014-09-13 02: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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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에 요코 지음/서은숙 옮김/돌베개/1만3000원
자금성 이야기-청대의 역사를 거닐다/이리에 요코 지음/서은숙 옮김/돌베개/1만3000원


1924년 11월4일 오후4시10분. 자금성 최북단에 자리한 신무문이 열렸다. 그리고 평민이 된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의(溥儀) 일행을 태운 5대의 자동차가 이 문을 빠져나갔다. 1644년 청나라 초대 황제인 소년 순치제를 앞세우고 숙부 도르곤이 명나라 신하들의 절을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자금성 남쪽의 정문인 오문에 들어선 지 280년 만의 일이다. 일본인 작가 이리에 요코의 신간 ‘자금성’은 이 거대한 성 안을 차근차근 돌아보며 각각의 공간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으며, 또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설명한다. 자금성의 인문적 안내서라고 스스로를 낮췄지만, 자금성이라는 무대에 펼쳐놓은 청나라의 통사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천제가 거주하는 곳을 하늘의 중앙으로 여겨 ‘자미원(紫微垣)’이라고 불렀다. 자금성이라는 이름은 지상의 자미원임을 가르키는 ‘자궁(紫宮)’과 일반인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 구역인 ‘금지(禁地)’가 합쳐진 말이다. 명나라 때 처음 지어진 자금성은 오랜 중화사상에 근거해 설계된 궁전이지만, 청나라는 그 안에 만주족의 정체성과 문화를 녹여냈다.

자금성 건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황제들의 이야기는 영상을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명군으로 꼽히는 강희제의 자취는 그의 명석하고 근면한 통치를 상징하는 건청궁과 폐태자의 불행한 사연을 담은 함안궁에서 엿볼 수 있다. 냉철하고 합리적인 정치를 펼친 옹정제의 성격은 양심전의 실용적이고 산뜻한 구조에 잘 드러나 있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건륭제 시대는 자금성 안에 또 다른 자금성을 조성해 놓은 그의 야심작 영수궁에 압축되어 있다.

청조 쇠락의 흔적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융종문의 현판에는 천리교도의 침입 때 생긴 화살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다. 영수궁에서는 여제로 군림한 서태후가 통치한 시대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저자는 황제뿐만 아니라 후궁, 태감(환관) 등 ‘아랫사람’들의 생활상과 애환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다.

이 책의 마지막은 1925년 10월10일, 신해혁명 기념일에 자금성이 인민들의 고궁박물원으로서 새 출발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저자는 “이 공간을 무대로 삼은 청조가 진정으로 종언한 날은 바로 이날”이라고 적었다.

박창억 기자 danie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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