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군사정변 후 계몽운동 주역
이기훈 지음/돌베개/1만8000원 |
1945년 광복 이후 격변하는 한국의 현대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어렵지 않게 ‘청년’을 만나게 된다. 청년은 격동의 시대 가장 앞자리를 지킨 존재로 언제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맡은 역할과 그에 대한 평가와 의미는 시절마다 달랐다.
광복 직후는 “청년이라는 말의 정치적 울림이 극에 달하는” 시기였다. 일제가 쫓겨가고 생긴 권력의 공백을 차지하기 위한 좌·우익의 격돌이 있었고, 미군정과 각 진영 내부의 갈등이 더해지면서 혼란은 극심했다. 청년은 쟁투의 선두에 서 있었다. 좌파에서 먼저 주도권을 쥐었지만, 공격적 성향을 보인 우익 청년단체가 미군정 등의 지원을 등에 업고 전세를 역전시켰다.
우익 청년은 “애국의 정열과 우국의 순정에 넘치는 존재”로 규정되었고, “극단적으로 공격적인 반공·반소 이데올로기”로 무장했다. 실제로 대한민주청년동맹, 서북청년단 등은 테러를 저지르며 급성장했다. “한국 정치의 힘에서 어떤 정당이 자신의 대의에 열렬히 충성하며 ‘더러운 일’(dirty works)을 수행할 강력한 무장 청년단체가 없다면 다른 정치조직에 아무런 위협도 될 수 없다.” 미군정이 내린 평가다. 이승만정권 아래에서 통치자에 대한 충성 조직으로 전환한 청년단체는 군·경찰 등 역할까지 수행하며 실질적 국가기구로 기능했다.
반공 이데올로기와 권력의 첨병으로 역할하던 청년은 4·19혁명을 계기로 전혀 다른 정치적·문화적 주체로 자리잡았다. 특히 대학과 대학생이 청년의 주인공이 됐다. “지성, 덕성의 부족과 생활의 타락”을 질타받던 대학생은 4·19와 더불어 “제2의 해방을 전취(戰取)한 주체로서, 더 높은 혁명의 깃발을 내걸었던 젊은 사자들”로 규정됐다.
이때의 청년에게 ‘순수’는 가장 큰 특징이었다. “‘순수한 청년학도’는 국가권력이 장악한 기존의 ‘반공청년’을 넘어서는 새로운 청년상이자 정치적 대안이었다.” 하지만 4·19를 실질적으로 이끈 것은 고등학생이며, 대학생은 마지막 국면에야 등장했다는 점에서 “대학생이 4·19를 만들어냈다기보다 4·19가 대학생이라는 사회·문화적 주체를 탄생시켰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4·19혁명 당시 청년들은 정권의 부도덕성을 질타하며 한국 사회의 발전을 이끌었다. 4·19는 이전까지만 해도 큰 기대를 받지 못했던 대학생이 청년 세대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1970년대 형성된 청년, 청년문화의 저항성은 지금까지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청년문화론은 도시화, 산업화가 일정 수준에 이르면서 “대학생을 중심으로 기성 문화와 구별되는 새로운 소비문화를 선도할 수 있는 시장이 형성되면서” 활발하게 개진됐다.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는 청년문화의 아이콘이었다. 하지만 대학생들은 외래 스타일, 소비 지향의 이미지로 덧씌워진 청년문화를 배격하며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고 미래의 희망에 불타 있다”고 스스로를 규정했다. 1980년대 민주화를 이끈 청년의 힘은 그렇게 태동했다.
책은 이처럼 청년이 시대마다 수행한 역할의 의미를 통해 청년 개념의 전개와 변천을 다루며 한국 근현대사에 접근한다. 교육을 통해 문명화된 국민으로서 청년이 만들어진 애국계몽기, 근대적인 개인의 출현과 민족을 선도한 1910년대의 일본 유학생, 1920년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의 청년 선점 경쟁 등을 작은 주제로 올렸다.
청년에 대한 추적은 자연스럽게 오늘날의 청년을 반추하게 한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살고 있지만 ‘3포세대’, ‘88만원 세대’란 말로 대표되는 절망의 구조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 지금의 청년이다. 역사는 지금의 청년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할지 묻고 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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